2화 마음의 숨구멍.
제법 어두워진 골목에는 여전히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로 걸어가고 있는 성진이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평소 직장에서는 농담도 잘하고 동료들과도 잘 지내면서 쾌활한 모습이지만, 혼자 있을 때만큼은 완전히 다른 표정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가끔 깊은 한숨까지 뱉어내며 깊은 고민이 있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힘없이 걸어가던 성진이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고 한 곳을 응시했다. 그곳은 편의점 앞에 있는 동그란 테이블이 있는 파라솔이었다. 잠시 망설이던 성진은 한동안 파라솔을 바라보다가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성진은 술병이 나란히 진열되어 있는 냉장고로 가서 버드와이저 한 병을 꺼내 들고는 계산대로 왔다. 그러자 남자직원이 환하게 미소 지으며 말을 걸었다.
“오늘도 버드와이저 한 병이네요.”
성진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다소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네, 왜요? 한 병만 사면 안 되나요?”
성진의 냉랭함에 직원은 당황하며 두 팔을 들어서 항복하는 듯 한 제스처를 보였다.
“아, 아니요 그런 뜻이 아니라, 매일같이 오셔서 늘 같은 맥주를 딱 한 병만 사는 게 궁금했어요. 게다가 문을 열고 나가시면서 병째로 드시는 모습이 멋져 보였어요. 마치 외국영화의 한 장면 같다고 생각했어요.”
성진은 직원의 부드러운 미소와 생각지도 못한 해명에, 이제야 오해가 풀렸다는 정도의 표정을 지으며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밖으로 나왔다. 괜한 질문을 한것이 아닌 가 하는 생각에 난감한 직원은 쑥스러운 듯 머리만 긁적였다. 성진이 파라솔에 앉아 고개를 젖힌 채 버드와이저를 벌컥벌컥 들이켜자, 식도에서 느껴지는 살짝 따끔거림의 쾌감과 함께 청량감에 반사적으로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것은 맥주가 주는 짜릿한 쾌감 때문인지, 아니면 가슴속에 맺힌 고통스러운 무언가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거의 사나운 야생동물의 거친 그로울링에 가까웠다. 절반 정도 마셔버린 버드와이저를 테이블에 올려두고 담배 한 대를 입술에 끼웠다. 목구멍에 탁 걸리다가 이내 식도로 빨려 들어가는 담배연기를 고스란히 느끼며 뱉어내는 행동은, 혼자만의 깊은 고민이 있는 성진에게는 유일하게 위안이 되는 것 중에 하나였다. 이것 때문에 건강이 어떻게 되는지 따위는 뒷전이었다.
이미 어두워진 동네 여기저기에서는 가족끼리 웃는 소리, 말다툼하는 소리가 여러 가지 찌개 냄새와 생선 굽는 냄새등과 어우러져 정겹게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서 다른 쪽을 바라보자, 이탈리아 피사의 사탑을 떠오르게 하는 기울어진 전봇대가 보였다. 전봇대 맨 위에는 쟁반같이 생긴 뚜껑을 눌러쓴 등이 동네를 간신히 비춰주고 있었고, 등 주변으로는 온갖 날벌레들이 자신들의 시간을 만끽하려는 듯이 이리저리 날아다니다 등에 부딪히기도 하며 신나게 맴돌았다. 잠시후, 편의점 문 위에 달린 조그만 종이 딸랑거리며 문이 열리더니 편의점 직원이 다가왔다.
“잠깐 앉아도 될까요?”
성진이 점원을 바라보며 비스듬하게 앉아있던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 네. 뭐...”
점원은 편의점 로고가 찍힌 비닐봉지를 들고 있었다.
“저, 이거 드리고 싶어서요. 조금 있으면 팔 수 없는건데 문제가 있는 건 아니에요. 오해는 하지 마시고 괜찮으시면 드리고 싶어서..”
비닐봉지 안에는 김밥과 샌드위치가 들어 있었다.
성진이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점원이 말을 이었다.
“그냥 궁금하기도 하고, 저랑 나이대가 비슷해 보이기도 해서 오래전부터 말을 붙여보고 싶었어요.”
“나이가 어떻게 되시는데요?”
“저는 올해 서른입니다.”
“어 저도 서른인데, 희한하네요. 이런 우연도 있네요.”
“어쩐지.. 역시 제 느낌이 맞았네요.”
두 사람은 잠시 쑥스러운 미소를 보이다가 점원이 먼저 말을 꺼냈다.
“괜찮으시면 우리 친구 할까요?
성진은 자주 보긴 했지만 낯선 사람이 갑자기 친구 하자는 제안에, 얼떨떨하면서도 생각해 보니 그리 나쁘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 뭐 그럴까요?”
“저는 백 승대라고 합니다.”
“저는 박 성진입니다.”
두 사람은 서로 악수를 하고 미소를 지었다.
“이거 정말 먹어도 괜찮은 거예요. 아참 친구 하기로 했으니 말 놔도 되지?”
“그래. 근데 편의점 음식을 잘 먹어보지 않아서..”
성진이 망설이자 승대가 비닐봉지를 앞으로 밀었다.
“먹을 만 해 유통기한이 사용기한은 아니거든. 난 매일 먹는데 뭐. 그리고 시간 되면 술 한 잔 할까?”
“술? 난 들어가 봐야 하는데.. 사실 술 생각이 나긴 했는데 집사람이 기다리고 있어서 망설이다가 맥주나 한 병 마시고 가려 했거든.”
“아, 그래서 아까 입구에서 머뭇거렸던 거구나. 간단하게 한잔하자 기념으로.. 나 곧 교대할 거거든.”
“어쩌지 힘들 거 같은데.”
“에이, 그러지 말고 딱 일병씩만 하자 내가 쏠게. 알았지?”
“아니, 저...”
승대는 성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반강제로 성진을 앉혀 놓고는 편의점으로 들어가 버렸다. 성진은 난감했다. 이런 일도 다 생기는 구나하며 신기하다가도 집에서 기다릴 아내의 얼굴이 떠올라서 안전부절 했다. 잠시 후, 다시 문에 달린 조그만 종이 딸랑거렸다.
“자! 교대하고 나왔어. 오늘은 간단하게 한잔하고 다음에는 내가 요 앞에 순댓국 잘하는 집 아니까 거기로 가자.”
승대는 편의점에서 판매하는 대표 안주거리들을 테이블 위에 펼쳐 놓았다. 오징어, 비엔나소시지, 과자와 소주, 맥주 등 종류별로 다양하게 가지고 나왔다. 그렇게 술잔에 술을 서로 채워주며 객지에서 만난 친구 간의 추억을 새롭게 만들어 갔다. 서로 사는 이야기를 시작해서 고민 등을 나누었다.
“너.. 많이 힘들구나.”
“아니야, 무슨.. 내가 그렇게 보여?”
“내가 보기엔 많이 지친 거 같다. 누구나 말하기 힘든 일이 있기 마련이지. 말하기 싫으면 억지로 안 해도 돼.”
“이제는 사실 힘든지도 모르겠어. 그저 지친 것 뿐이야.”
승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성진의 술잔에 술을 따라주며 말했다.
“억지로 참지 마. 그러다가 한 번에 폭발하면 큰일 나는 거야. 너만의 숨구멍을 만들어야 해. 사람들은 잘 모르더라 각자의 숨구멍이 왜 필요한지를... 마음의 숨구멍이 반드시 있어야 해.”
“마음의 숨구멍...”
“세상은 모두 요구하기만 해. 직장에서는 이렇게 해라. 가정에서는 돈 벌어 와라. 하다못해 친구끼리도 서로 간에 보이지 않는 비교나 경쟁이 되지. 우리가 사는 세상이 원래 그래. 하지만 사람은 모든 걸 다 맞춰주며 살 수가 없거든. 그게 문제가 되는 거야. 그러다 오류가 생기고 점점 곪아서 결국 양쪽 중에서 어느 하나는 문제가 생기는 거지.”
“.....”
“내가 이제 네 친구가 됐으니 언제든 필요하다 싶으면 이곳으로 와. 다른 건 몰라도 네 말을 들어주는 정도는 가능하니까.”
“고맙다. 그런데 나 이제 진짜 가봐야 해.”
“그래, 다음에 또 한잔하자.”
“그래, 반가웠어 또 보자.”
한 잔만 하자는 술자리 맹세는 늘 깨지기 마련이듯 성진도 이미 만취에 가까운 상태였다. 비틀거리며 간신히 집에 다다르자 걱정이 밀려왔다. 승대가 챙겨준 김밥과 샌드위치가 손에 들려 있었지만 이것만으로는 집사람의 역정을 무마시키는 것까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보증금 백만 원에 월세 십 오만 원인 단칸방인 성진의 집은, 공동대문을 지나 부엌 겸 석유 보일러실이 있는 문을 열고 들어가야 방 문에 이르렀다. 그야말로 이층으로 된 오래된 단독주택이었다. 5년 전 사내커플로 만남을 이어가다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결혼생활을 시작한 이유도 있었지만, 두 사람의 형편이 어렵다 보니 월세 방을 벗어나지 못했다. 결혼 후 아내는 사칙 때문에 릴리트 호텔을 그만두고 다른 호텔에서 계약직으로 일을 하며 적금을 들었다. 내 집 마련의 계획은 세우고 있었지만, 경제적인 여유가 없어지다 보니 어느순간 연애시절처럼 서로에게 대한 애정보다는 다툼이 늘어났다.
“나 왔어.”
“........”
자신이 들어왔다고 말하기 전에 이미 공동현관의 문소리만으로도 충분히 알아챌 수 있었지만, 들어와서 말할 때까지 아는 척 조차 안하는 아내의 무관심에 성진은 서운함이 밀려왔다.
“나 왔다고..”
“씻어. 늦은 거 보니 밥은 먹었을 테고. 아니, 술을 마셨겠지.”
“그렇게 밖에 말 못 해?”
“내가 뭐?”
“요즘 왜 그래? 같은 말이라도 그렇게 밖에 못해? 술을 마셨다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하지도 않아?”
“무슨 일이 있었으면 당신이 먼저 얘기해 주면 되지, 꼭 누가 먼저 알아주고 그런 게 중요해?”
“나는 지금 우리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서 말하는 거잖아. 관심 좀 가져주면 안 되냐고!”
“내가 한가하게 집에서 노는 게 아니라고. 나도 하루 종일 일하고 퇴근해서 집안일하느라 정신이 없어. 오늘따라 왜 안 하던 투정을 부리고 난리야!”
“알았다. 그만하자. 내가 못나서 그렇지 뭐. 다 내 잘못이다.”
“항상 저런 식이지. 먼저 시비 걸어서 사람 성질만 돋우고..”
“그만하자고!”
“소리 지르지 마! 주인집 눈치 보이잖아!”
성진은 신경질적으로 옷을 벗은 후 던져놓고 부엌으로 들어가서 샤워를 했다. 둘이 좋아라 해서 살게 되면 비록 부족한 살림살이지만 서로 의지하고 사랑하며 행복할 줄 알았던 결혼생활은, 자신의 착각이었다는 생각이 들자 견딜 수가 없었다. 모든 게 자신의 능력이 부족한 결과라고 생각하니 자괴감까지 들었다. 성진은 더 이상 집에 머물러 있기가 싫었다. 질식할 것 만 같은 기분은 오롯이 술기운 때문만은 결코 아니었다. 성진은 몸에 묻은 물기를 대충 닦아내고 다시 옷을 주섬주섬 입기 시작했다. 그러자 갑작스러운 남편의 돌발행동에 아내가 놀라면서 성진을 바라봤다.
“뭐 하는 거야? 어디 가려구?”
“신경 쓰지 마. 피곤할 텐데 어서 자.”
“아니 이 밤에 어디 가는지 말은 해줘야지.”
“내가 깜박했어. 오늘 마감 조 끝나고 전체 회식이 있어. 회식 끝나고 숙소에서 자고 아침에 바로 출근할 거니까 그렇게 알아.”
“퇴근해서 음성도 안 남기고 술까지 먹고 들어와서, 또 술 마시러 나간다고? 그렇게 직원들이 좋으면 왜 나랑 결혼했어? 하고 싶은 거 하면서 혼자 살지.”
“난 회식자리도 가면 안 되니? 그래도 당신 남편이 명색이 지배인이다.”
“무궁화 세 개짜리 도 호텔이라고.. 그런 곳에 지배인 월급은 왜 그 모양이라는데? 2급 호텔 식음료 지배인이라도 할 건 다 해야 직성이 풀려?”
“정말 그딴 식으로 밖에 말 못 해?”
“그래. 당신은 지배인님답게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살아.”
“너, 정말..”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성진은 이 상황이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았다. 변해버린 아내의 모습도, 이런 자신의 모습도 그렇고 이런 부부관계가 맞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이제는 너무 멀리 떨어져 버린 두 사람의 거리 때문인지 그녀에게 다가갈 수가 없었다. 아니, 다가가기 싫었다. 성진은 도망치듯이 문을 박차고 나와 버렸다.
“릴리트 호텔 앞이요.”
성진은 택시를 타고 호텔로 향했지만 마음은 무겁고 착잡했다. 가슴속에는 마음의 숨구멍을 찾아서 방황하는 또 다른 자신을 발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