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1화.
1995년 어느 화창한 봄날 오후.
8층짜리 회백색의 아담한 2급 호텔 건물. 그 옆에 자리한 조그만 주차장을 가로질러 황급히 달려오는 여자가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고 진경. 차림새로는 누가 봐도 이 호텔에서 근무하는 호텔리어다. 여자는 저번 주 까지는 1층 커피숍에서 근무를 하다가 오늘부터는 2층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근무를 해야 하는데, 오후에 주간 조와 교대해야 하는 시간에 늦어 버린 것이다. 늦잠 때문인지 교대시간에 늦은 여자는, 지각임을 눈치 챌 수 있는 모습은 다 갖춘 채 뛰어가고 있었다. 분홍색 스커트의 허리 쪽에는 한쪽만 간신히 구겨서 넣어진 흰 블라우스와, 옷깃에는 버건디 바탕에 하얀색 작은 점이 프린트된 꽃 모양의 보우타이가 위태롭게 달랑거리고 있는 것이 그 증거였다. 그녀가 하는 일은 각 업장에서 수납업무를 맡고 있는 일명 케쉬어 이지만, 복장에 대한 기준은 웨이트리스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그녀의 어중간한 머리길이는, 우스꽝스런 짧은 꼬리를 가진 조랑말의 형태처럼 포니테일 스타일로 묶은 상태였지만, 아주 짧은 쇼트커트 헤어스타일이 아니라면 단정하게 묶은 후 동그랗게 검정색 망을 씌워서 정리해야 하는 것이 호텔규칙이었다. 하지만 정신없는 바람에 거기 까지는 차마 신경을 쓰지 못한 모습이었다. 레스토랑은 2층에 있었으며 통유리로 되어있었다. 밖에서는 내부를 못 보지만 안에서는 밖을 바라볼 수 있는 마감작업이 된 유리였다. 2층 레스토랑 백사이드로 연결된 뒷문 쪽으로 향한 그녀의 또각또각 거리는 구두소리가 더욱 다급하게 통로에 울렸다. 그녀가 자동문에 서자, 센서가 사람을 인식하고는 서서히 열렸다. 곧이어 향긋한 꽃향기와 방향제 냄새를 가득담은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그녀의 얼굴을 스치자, 호텔리어답게 방긋 미소를 지으며 어깨와 허리를 곧게 편 채 당당하게 입장을 했다. 아무리 다급하더라도 홀에서는 뛰면 안 되었기에, 거의 경보수준의 발걸음으로 홀 중앙에 멋스럽게 놓인 그랜드피아노를 지나 카운터 데스크로 향했다. 레스토랑 안에는 George Winston의 Thanksgiving이 그녀의 조바심과 복장상태와는 정반대로 여유롭게 흐르고 있었다.
“너는 지금 시간이 몇 신데..”
카운터 데스크에서 비스듬하게 기대어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레스토랑 지배인인 성진이 그녀를 흘겨보며 한마디 했지만, 진경은 아랑곳 하지 않고 카운터 데스크 안으로 성진을 밀치듯 비집고 들어갔다.
“아 몰라 몰라. 정신없어 비켜봐 오빠.”
“이놈이. 직장에서는 오빠라고 하지 말라니까.”
평소 두 사람은 음담패설도 깔깔 하하 거리며 대화 할 정도로, 스스럼없이 친하게 지내는 친남매 같은 사이였다. 성진의 나무람에도 여전히 정신없는 진경은 오른쪽 손바닥으로 삐져나온 블라우스를 스커트 속으로 연신 집어넣고 있었다. 곧이어 머리에 망을 씌우지 않은 것을 알아차리고는 양 팔을 축 늘어뜨린 채 짜증을 냈다.
“아이참, 이건 또 어디 간 거야.”
진경은 카운터 데스크 옆에 달린 린넨 창고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곳 책상에 엎어져서 업어 가도 모를 정도로 도둑잠에 빠진 웨이트리스를 손으로 툭툭 쳤다.
“어이. 선주! 잠은 집에 가서 자지 그래.”
선주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는 진경을 바라보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헤헤. 언니, 또 늦은 거야? 어제 오빠랑 또 한 잔 했구만?”
“야 됐고. 너 머리 망 있으면 하나 줘봐. 잊어버리고 왔네..에이씨.”
“없어. 그냥 이거 써.”
선주가 자신의 머리에 감싸져 있던 머리 망을 벗기자 정전기 때문에 산발이 되었다.
“어쭈. 막나가네. 넌 어떻게 하려구? 교대 안 해?”
“괜찮아 총지배인님한테만 안 들키면 돼. 어차피 시간 다 됐는데도 안 올라오는 거 보니 괜찮겠지. 난 몰래 갈 거야 성진이 오빠가 해결해 주겠지.”
두 여자가 비행소녀들처럼 허락이 불가능한 행동을 인정받으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동시에 성진을 바라보자, 성진이 못마땅하다는 듯 팔짱을 끼고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어쭈, 아주 잘 한다 잘해. 한 놈은 교대시간 지각에 복장도 개판이고, 한 놈은 교대 할 생각도 안하고 계속 농땡이에 머리까지 산발이고, 참내 어이가 없어서...”
“아잉..오빠. 아니, 지배인님! 한번 봐줘요. 네?”
“하.. 이럴 때 만 지배인이지?”
진경이 성진에게 다가가 팔짱을 끼고 아양을 떨자, 성진은 마지못한 채 퉁명스럽게 말했다.
“야야 넌 빨리 교대하고, 선주 넌 밖으로 나오지 말고 짱 박혀있어. 엎어져 잤다는 증거가 얼굴에 그대로 남아서, 그 몰골로 나왔다간 총지배인님한테 나만 깨지니까. 안 그래도 저기 백 진이 온다. 진이가 또 한소리 하겠군.”
오전 캐쉬어 근무자인 진이까지 포함하여 세 명의 여자가 모이자, 카운터 데스크는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로 가득했다. 성진은 모습을 보고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베버리지 바 쪽으로 걸어갔다.
“이놈들은 교대시간에 또 어딜 간 거야.”
교대할 웨이터와 웨이트리스들이 보이지 않자 짜증이 솟구친 성진이 자동문 뒤에 있는 백사이드 쪽으로 갔다. 그러자 바퀴벌레가 동창회라도 하는 듯, 여럿이 모여서 마늘빵에 커피를 마시는 그들을 찾아냈다. 성진에게 발각된 그들은 깜짝 놀라며 겸연쩍은 미소와 함께 얼어붙었다.
“오늘따라 이것들이 단체로 작정을 했나, 빨리 치우고 교대 안 할 거야? 집에 가기 싫어?”
“지배인님. 인벤토리도 다 맞춰 놨고, 인수인계도 다 했어요.”
캡틴인 영진이 나서서 당당하게 대답하자, 성진의 오른손이 올라와 냉큼 꿀밤을 때렸다.
“얌마! 냅킨은? 저녁영업 준비는 안 할 거야? 모두 냅킨 접을 때 까지 집에 못갈 줄 알아! 태진이 넌 입가에 파슬리가루나 닦고 나가! 어휴 이것들이 정말.”
냅킨을 접어놓는 걸 깜빡한 바퀴벌레들은, 아차 하는 표정으로 다급하게 흩어지며 린넨 창고로 향했다.
“오빠! 오늘 저녁에 올 거야?”
자신의 머리 망을 내어준 선주가 어느새 사복을 갈아입고 백사이드로 들어왔다.
“가정이 있는 남자가 그 시간에 어떻게 나오냐?”
“회식인데 언니한테 잘 말해 봐요.”
“야 내가 그런 호사를 누릴 팔자로 보이냐? 넌 사복으로 갈아입었으면, 총지배인님 눈에 띄기 전에 어서 사라져.”
“칫. 재미없어. 간만에 레몬소주 한잔해요. 사람이 좀 스트레스도 풀고 그러면서 살아야지 언니한테 너무 충성하는 거 아니야?”
“충성은 무슨.. 월급 작다고 맨 날 눈치 주는데.”
“에이 언니도 너무했다, 그래도 호텔에서 인정받아서 지배인도 빨리 달았고, 급여는 좀 그렇지만 성실하겠다, 얼굴도...뭐 헤헤. 어쨌든 이만한 남자도 없는데. 안그러우 오라버니?”
“어이구 고마워서 눈물이 다 납니다. 까불지 말고 어서 들어가. 니 서방님 눈 빠지게 기다리겠다.”
“알았어요. 늦게라도 생각 바뀌면 삐삐 쳐!”
“그래 알았어.”
성진이 선주를 보내고 백사이드에서 나온 뒤, 베버리지 바에 있는 커피머신에서 커피 잔을 들고 있는 진경에게 다가갔다. 성진은 고블렛에 녹차 티백 한 개를 우려낸 뒤, 얼음을 잔득 담아서 손목 스냅으로 고블렛을 휘 이 돌렸다.
“이제 정신 좀 차렸냐?”
“뛰어 오느라 죽는 줄 알았어. 총지배인님이 한 번 더 걸리면 시말서 각오하라 그랬거든.”
“으이구, 누가 널 말리겠냐. 넌 생긴 건 이쁘장하게 생긴 놈이, 하는 짓은 왜 선머슴아 같냐? 털털한 걸 넘어서 얼굴만 가리면 완전 사내잖아.”
“뭐야 오빠. 선머슴아는 너무 한 거 아니야? 어디 숙녀한테 말이야. 어?”
“그러니까 어울리는 짓을 해”
“그건 그렇구, 오늘 야간 조 끝나고 지하 민속주점에서 다 모인다는데 갈 거유?”
“내가 어떻게 가냐. 가정이 있는 사람이.”
“난 가정이 없슈? 나도 마찬가지지.”
“야 넌 정확히 말해서 동거고 나랑 같냐?”
“얼라리어! 왜 이러셔 나도 할 건 다 한다 뭐. 빨래도 하지, 청소도 하지. 언니한테 전체 회식이라고 말해 봐. 그래도 안 돼?”
“늦는 거 싫어해.”
“야 오빠 같은 남자를 만나야 하는데...우리 오빠도 배워야해.”
“넌 언제 결혼식 하냐? 기집애가 동거 이런 거 오래하면 못쓴다. 게다가 둘이 매일 술만 마시고... 젊음 그거 금방 간다. 나이 금방 먹는다고!”
“아 또 잔소리 알았어 알았어. 오빤 다 좋은데 그놈에 잔소리가 문제야. 총지배인님 뜰 때 됐어 나 데스크로 간다.”
성진은 커피 잔을 들고 카운터 데스크로 걸어가는 진경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혀를 끌끌 찼다. 잠시 후, 카운터 데스크 옆에 있는 30인석 정도 수용이 가능한 크기의 연회실에는 주간 조와 야간 조가 교대를 하기 위해서 마치 의장대 행사하는 군인들같이 일렬로 반듯하게 정렬해 있었다. 평소 약속시간에 늦는 법이 없던 총지배인이 오늘따라 십분 넘게 늦었다. 총지배인이 이렇게 늦게 올 줄 모르고 괜히 서둘러서 뛰어온 진경의 얼굴에는, 아쉬움과 안도감이 섞인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다들 모였나? 한명이 안 보이는데?”
역시 예리한 총지배인이었다.
“아 네. 박 선주 씨가 오후부터 몸이 안 좋아서 먼저 들어가라고 했습니다.”
“지배인! 이래서 봐주고 저래서 봐주라고 그 자리 앉힌 거 아니에요. 관리를 하라고 앉힌 겁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어요?”
“네.”
“어디가 어떻게 아프다고 하던가?”
“네 그게 저.. 한 달에 한번 여성분들의..”
“음.. 알았어.”
호랑이로 유명한 총지배인을 상대로 간도 크게 잔머리를 써서 난감한 상황을 넘기자, 여직원들은 놀라움과 감탄이 섞인 표정이었다.
“자! 오늘은 시간이 없는 관계로 한 가지만 전달하고 끝내겠습니다.”
평소 같으면 복장상태, 두발상태를 점검하다 못해, 화장이 진하다 부터 시작해서 손끝과 손톱의 길이까지도 점검했는데 오늘은 모두 생략한다는 말이었다. 아직까지도 자신의 복장상태가 불안했던 진경은 남몰래 오른손으로 주먹을 불끈 쥐고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아마도 그녀의 성격상 마음속으로 아싸 가오리 정도는 외치고도 남았으리라.
“내일 내가 오후에 호주로 출장을 갑니다. 그래서 내일 오후에 신입사원 면접이 있는데 지배인이 나를 대신해서 면접을 진행하고 보고하도록 하세요.”
신입사원이라는 소리에 모두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수근 대기 시작했다.
“주간 조는 아침부터 고생 많았고, 마감 조는 늦게까지 고생 좀 하세요. 손님이 뜸 하다고 홀 비우지 말고 스탠바이 잘 하도록 하세요. 알았나 캡틴?”
“아 네. 알겠습니다.”
군대에서 치르는 점호와 같은 살벌한 분위기가 끝나자, 연회실 여기저기에서 왁자지껄한 소리로 가득했다. 모두들 삼삼오오 모여서 밤에 모여서 놀 궁리와 내일 면접이 있다는 신입사원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이리저리 흩어졌다. 성진도 사복으로 갈아입고 건물을 빠져나왔다. 피곤함에 어깨가 축 늘어진 채 걸어가는 성진의 뒤로, 호텔은 알록달록한 네온사인과 간판불로 옷을 갈아입으며 낮과는 또 다른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