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3화.
택시에서 내리자 호텔 앞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던 진경이 성진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라며 뛰어왔다.
“어라 어떻게 된 거야? 언니가 오케이 한 거야?”
“아니 그런 건 아니고.”
“난 오빠가 나올 줄 알았는데, 선주는 삐삐도 없어서 아마 못 나올 거라고 했거든. 어쨌든 잘됐다. 간만에 레몬소주 한잔해야지.”
“전부 모인 거야?”
“야간 조는 조금 있으면 끝나니까 바로 올 거고, 선주랑 진이랑 선영이 언니도 나온데. 그리고 벨 맨 아저씨랑 프런트 데스크 언니들도 나온 다 그러던데. 오늘 어마무지하게 모이겠어. 다들 술이 고팠던 거지. 그나저나 오빠 표정이 왜 그래, 뭔 일 있었어? 설마 부부싸움?”
“아냐, 들어가자.”
“오빠 먼저 가. 나 삐삐 좀 치고 갈게.”
“그래 알았다.”
성진은 허한 마음을 누르며 주점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자정 이후의 영업은 어느 정도 자율화가 된 상태지만, 아직도 단속을 하기 때문에 간판불은 꺼져있었기에 출입은 뒷문으로만 몰래 들어가야 했다. 밖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철문을 열고 계단을 내려가니 노래방 소리가 들려왔다. 눅눅하고 쿰쿰한 알코올 찌든 냄새가 진동하는 계단 아래에는 맥주박스와 소주박스가 입구를 떡 하니 막고 있었다. 옆으로 가까스로 비켜서 들어가니 내부는 그야말로 바깥세상과는 사뭇 달랐다. 거의 만석에 가까운 상태였다. 노래방에서 나오는 미러볼의 반짝거리는 불빛과 빨강 노랑 초록의 삼색 셀로판지를 더덕더덕 붙인 알록달록한 형광등은, 값싸게 분위기 띄우려 노력한 모습이 역력했다. 공중전화기 앞에는 음성사서함을 확인하려고 모인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주점 사장은 계속해서 주문하는 레몬소주를 만들기 위해서 다이아몬드 모양이 새겨진 투명한 호리병에 연신 레몬소주를 제조하고 있었고, 채소와 고기를 기름에 볶은 매콤하고 자극적인 냄새가 실내에 진동했다.
“여기 여기 오빠!”
“형님! 여기요!”
이미 알코올의 도움으로 흥이 오른 직원들이 성진을 발견하고는, 과장된 손짓과 미소로 성진을 불렀다.
“일찍들 모였네.”
“어떻게 된 거예요? 오늘 못 나오신다고 그러던데.”
“아 뭐 그렇게 됐네. 그냥 한잔 생각이 나서...”
“잘 오셨어요. 형님!”
“잘 왔어 오빠. 저번에 승진 턱 쏘실 때 같이 못했는데.. 오늘 내 잔 다 받아야 해요.”
“어이구 내가 잘못 왔나? 하하, 그래도 반겨주는 건 우리 식구들 뿐이구나.”
“자! 한잔 받아 오빠. 어? 저기 진경이 언니랑 프런트 데스크 언니들도 오네. 여기야 여기!”
평소 같은 박 씨라는 이유만으로 친동생같이 따랐던 선주가 레몬소주를 잔에 따라주자, 뒤이어온 진경이 성진이 옆에 앉았다. 진경이나 선주는 친 여동생 같은 사이라서 늘 성진을 잘 따랐고, 성진도 두 사람을 잘 챙겨줬다.
어느덧 마감 조 직원들도 합류를 하기 시작했고, 식음료부서 직원과 프런트 데스크 직원까지 열 명이 넘는 사람들로 가게 안은 왁자지껄 정신이 없었고, 그만큼 빈병도 점점 빠르게 늘어났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 하더라도 직장인은 어쩔 수 없나 보다. 거하게 취하자 저번에는 무엇 때문에 서운했다부터 시작해서, 사소한 시비 때문에 말싸움이 벌어졌다가 다시 화해하는 어수선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물론 회사 회식이라는 것이 그러면서 정도 들고 하는 것 아니겠는가. 극한 감정싸움 때문에 다음날까지 후유증만 남지 않는다면 말이다. 분위기가 점점 갈수록 예민해 지려하자, 분위기 전환을 시도하기 위해서 진경이 나섰다.
“자자~ 여러분 이러지 말고 노래방으로 입장합시다. 각자 앞에 있는 술잔과 안주접시를 든다. 실시! 저기 저.. 영진 오빠. 말 그만하고 접시 들어. 에이 씨 내 말 안 들을래? 여기선 내가 캡짱이야. 알간?”
예민해져서 목소리를 높이던 사람들도 진경의 카리스마에 피식 웃으며 분위기가 금방 풀어졌다. 말이 노래방이지 주점 안에 노래방 기계만 놓여있는 부스였기에 매우 좁았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어찌어찌하다 보니, 좁은 노래방 부스에도 다닥다닥 붙어서 앉을 수 있는 신기한 능력을 발휘했다. 그 좁은 공간에서도 목청 터져라 노래를 부르는 사람, 여전히 자기는 억울하다고 옆 사람에게 하소연하는 사람, 무엇이 그렇게 재밌고 즐거운지 연신 하하 호호 거리며 웃는 사람. 성진은 여러 번 술잔을 주고받으며 제법 마셨지만, 이상하게 취기가 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동료들이 여러 가지 형태로 쌓인 스트레스를 푸는 모습을 나름 흐뭇하게 바라보며 기분전환을 하고 있었다. 그러자 누군가 성진의 어깨를 툭툭 쳤다.
“오빠! 컴온!”
음악 소리와 떠드는 소리에 잘 못 알아듣자, 진경이 오른손 검지를 까딱까딱 거리며 큰소리로 외쳤다.
“오라버니! 컴온!”
진경이 성진의 손을 잡고 아비규환 같은 노래방 부스를 빠져나왔다.
“왜? 무슨 일인데?”
“샤랍! 사장님 여기 레몬소주 일병이랑 오돌뼈 주세요!”
성진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진경을 바라보자 진경이의 눈은 이미 풀려있었다.
“야 인마! 너 많이 취했어. 니 오빠한테 혼나면 어쩌려구.”
“괜찮아.. 끝나고 삐삐 치면 데리러 온댔어. 그나저나 나 신경 쓰여서 도저히 안 되겠어.”
“뭐가 인마.”
“오라버니 말이야. 도대체 왜 그래?”
“내가 뭘?”
“아 놔 이 아자씨가 정말...”
“밑도 끝도 없이 뭐라는 거야.”
이때 노래방에서 선주가 나와서 진경이 옆에 앉았다.
“어? 뭐야 두 사람이 나만 빼놓고 미워 잉..”
“야 선주야. 이 오라버니 오늘 군기 좀 잡아야겠다.”
“왜 언니, 오라버니가 뭐 잘못했어?”
“아주 많이 잘못했지! 암암..”
“오라버니.. 왜 그러셨어용. 힝.”
“아니 이놈들이 오늘 아주 작정을 했구나. 야, 안 되겠다 니들 그만 마시고 들어가. 내일 어쩌려고 이래!”
“나 참, 오라버니! 우리가 이런 게 하루이틀이유? 잘 알면서 선수끼리 왜 그러셩?”
“참내 이것들 뭐야? 말해봐 빨리.”
취한 모습의 진경이 어느새 똘망똘망한 눈으로 성진을 뚫어지듯 바라보았다.
“이야기는 오빠가 해야지. 오빠, 말해봐 요즘 힘들지?”
“나? 아니, 괜찮은데..”
성진의 대꾸에 진경이 입을 삐쭉거리며 오른손 검지를 자동차 와이퍼 닦듯이 좌우로 흔들거렸다.
“에이, 아니야 아니야! 우리가 한 해 두해야? 무슨 빤스를 입고 댕기는지 까지 다 아는 사이 아닌가? 차라리 귀신을 속여라.”
“기집 애가 말본새 하고는.. 정말 괜찮아.”
“정말 이러기우? 우리 사이에?”
진경의 추궁에 선주도 가담했다.
“그래 오빠. 진경이 언니가 괜히 이러는 거 아닌 거 같아. 우린 남이 아니잖아. 응? 뭔가 힘든 일 있으면 말해.”
성진은 두 동생들이 자신을 생각하는 마음과, 걱정하는 모습에 갑자기 울컥했다. 그러고는 앞에 놓인 술잔을 한 번에 들이켰다.
“이봐 이봐 뭔가 있다니까. 봤지? 선주야.. 이 남자 오늘 이실직고 안 하면 집에 보내지 말자.”
“오케이 언니 접수했어. 내가 삐삐 뺏을까?”
“그래 니가 좀 갖고 있어.”
선주는 성진에게 달려들었다. 성진은 안 뺏기려고 몸부림쳤지만, 아무리 장난이라 해도 성인여자의 몸에 함부로 손을 대며 거부하는 몸짓을 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야 야 그러지 마 말할게.”
“어? 어? 오빠 아무리 그래도 나 여잔데 막 만지면 안 돼.”
발버둥을 칠수록 자신이 여성이라는 점을 이용해서 손도 못 대게 하는 선주에게 삐삐를 뺏기는 건 시간문제였다.
“헤헤.. 언니 내가 뺏었어.”
“자 알.. 했어 박 선주. 자! 이제 이실직고를 하시오!”
“니들 마음은 알겠다만 오늘은 좀 과하다. 응?”
“오라버니. 나 진경이야. 고 진경! 나한테까지 이러기야 정말?”
“.....”
성진은 분위기를 보아하니 어느 정도라도 둘러대지 않으면 곤란하겠다는 판단이 서자, 최대한 머리를 굴려가며 가정사만 빼고 둘러대느라 애를 썼다. 그런 노력이 효과가 있었는지 두 여자는 다소 차분해진 표정으로 성진을 담담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게 다야?”
“뭐가? 도대체 뭘 기대한 건데?”
“.... 그래 오빠가 그런 거라면 그런 거겠지. 하지만 말이야 오빠가 뭔가에 힘들어서 도저히 혼자서는 안 되겠다고 느낄 때, 우리들을 잊지 마. 알았지?”
“그래 말이라도 고맙다.”
성진이 이쯤에서 잘 넘어갔다고 생각하고 술잔을 비우려 하자, 진경의 송곳 같은 질문 때문에 사레가 들 뻔했다.
“언니랑은 요즘 어때? 예전에는 가끔 우리 회식에도 나와서 같이 어울리더니, 언제부턴지 도통 얼굴을 안 보이네.”
“아, 그 사람 요즘 많이 바빠..”
“뭐야. 요즘 자주 싸우는 거야?”
“아니야. 그런 거..”
“오빠. 언니한테 잘해줘라. 알았지? 언니한테는 오빠밖에 없잖아.”
“그럼. 그래야지.. 짜식, 별 걱정을 다 하네.”
“선주야. 우리도 한잔하자. 그리고 우리 오라버니 십팔번도 들어봐야 하지 않겠어?”
어느새 옆에서 술을 이기지 못하고 꾸벅꾸벅 졸고 있던 선주가 화들짝 놀라며 방긋 미소를 지었다.
“그래 우리 오라버니 십팔번 사랑 할수록을 들어야 술이 깨지. 언니. 요거 한 병만 마시고 들어가자. 마무리는 해야지. 난 일과 이분의 일 부를 거야.”
“잠깐 둘이 마시고 있어. 나 우리 오빠한테 삐삐치고 올게.”
진경이 공중전화로 걸어가자 성진은 선주와 주거니 받거니 술을 마시기 시작했고, 노래방 부스 안에 있는 다른 주당들의 분위기도 미러볼의 화려한 불빛 속에서 여전히 들떠 있었다. 낮에는 단정한고 예의 바른 호텔리어들의 스트레스와 고단함은, 그들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몸부림치며 한껏 풀었다. 깊은 새벽, 그렇게 그들만의 축제가 깊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