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밀애.
그렇게 한 달 두 달 시간이 흘러갔고 두 사람의 사랑은 식을 줄 몰랐다. 퇴근 후 늦도록 술도 마시고, 가까운 곳으로 바람을 쐬러 가기도 했으며, 온갖 핑계를 대고는 모텔에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성진은 자연스럽게 귀가시간이 늦거나 외박하는 날이 늘기 시작했으며, 호텔 업무에도 조금씩 차질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오라버니 어제 또 한잔 한 거야?”
카운트 데스크에 서 있었던 진경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성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성진의 출근이 늦은 것도 있었지만 옷차림새도 후줄근했기 때문이었다.
“응? 아.. 그, 그래.”
“요즘 이상해. 점점 말수도 적어지고 초췌하네. 어디 아픈가?”
“아냐. 아프긴.”
“넥타이도 제대로 좀 매. 맨날 우리한테 잘 입고 다니라고 뭐라 하던 양반이 왜 이런데. 아, 맞다. 총지배인님이 오라버니 오면 사무실로 오라던데.”
“그래 알았다.”
성진은 화장실로 들어가서 거울 앞에 섰다. 거울에 비친 모습은 바라보자 자신이 보기에도 엉망이었다. 손에 물을 받아서 대충 머리손질을 하고 옷매무새도 고쳐 입고는 서둘러 사무실로 갔다. 사무실에서 신문을 읽고 있던 총지배인의 얼굴은 이미 굳어 있었다. 성진은 총지배인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대충 짐작하곤 긴장했다.
“지배인.”
“네 총지배인님.”
“요즘 집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아닙니다.”
“그런데 요즘 근태가 왜 그런가?”
“죄송합니다.”
“음...”
총지배인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손으로 턱을 쓸어가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는 책상 위에 놓인 담배를 꺼내어 입에 물었다.
“성진아.”
“네.”
“내가 다른 사람들이 너무 이르다고 만류 했지만 너를 왜 지배인으로 올린 줄 아니?”
“....”
“내가 이곳에 처음 왔을 때, 모두들 야단맞을까 두려워서 내 근처에도 오지 않았지만 너는 달랐어. 내가 레스토랑에 올라갈 때마다 마치 일부러 날 잡아먹어라 하는 듯이 먼저 다가와서 이런저런 말을 먼저 걸었지. 심지어 옆에 없었으면 안 들어도 될 작은 꾸지람을 들을게 뻔해도 먼저 다가왔지. 난 그런 너의 적극성이 마음에 들었다.”
“네.”
“그런데, 요즘은 일도 일이지만 항상 넋이 나간 듯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아. 이유가 뭔지 말해주겠니?”
“그냥, 좀..”
“혹시 바람피우니? 여자 생겼어?”
“아, 아닙니다.”
“네가 아무리 너를 인정하고 내 식구라고 생각해도, 사내연애는 특히 직원들하고 사적으로 가까워지는 건 용서 못해. 무슨 말인지 알아?”
“네.”
“앞으로 지금보다 나아지지 않거나 근태가 계속해서 나쁘면 안 된다.”
“네 죄송합니다.”
“그래 무슨 개인사정인지 더는 묻지 않겠지만 정신 바짝 차리고 일해.”
“네. 알겠습니다.”
“가봐.”
총지배인실에서 나온 성진은 안도의 한숨을 뱉으며 주차장으로 내려와 건물 뒤편으로 갔다. 그곳에는 선주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성진이 담배를 꺼내서 입에 물고는 담배연기를 길게 내뱉었다. 그러자 선주가 다가와 어깨를 툭 쳤다.
“오빠! 뭐야 요즘?”
“왜 뭐가?”
“그냥 평소에 오빠답지 않아서 그러지.”
“내가 뭐 어떤데?”
“음, 뭐랄까.. 그냥 딴사람 같아. 딱히 콕 집어서 말하긴 힘들지만, 최근 몇 달간은 확실히 달라. 남자가 바뀌는 건 둘 중 하난데. 도박을 하거나, 여자가 생겼거나 거든. 그런데 오빠 케이스는 도박은 아니고, 그런 거랑 거리가 먼 남자니까. 여자야?”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어서 올라가. 총지배인님 내려오실 거야.”
“음.. 말 돌리는 거 보니 역시 수상해.”
“빨리 안 가?”
성진이 선주를 등 떠밀다시피 돌려보내자 허리춤에서 진동이 울렸다. 성진이 삐삐를 쳐다보니 음성 메시지였다. 주차장 부스에 있는 전화기로 확인을 해보니 아내였다.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끝나고 바로와. 얘기 좀 해.’
아내의 음성은 차분하고 담담했지만 아주 차가웠다. 게다가 단호함에서는 적잖게 매서움도 느낄 수 있었다. 메시지를 들은 성진은 순간 가슴에 돌덩어리가 생긴 듯 답답함이 느껴졌다.
오후시간, 20인 예약으로 분주한 레스토랑.
“영진이와 남자들은 주방에서 꼬리곰탕 나르고, 선주는 바에서 음료 준비해. 그리고 나머지는 예약 석 반찬 준비 도와주고 일반 테이블도 잘 챙겨주고.”
직원들은 홀에서 식사는 손님과 예약석의 손님들의 음식시중을 드느라 담배 피울 짬도 나지 않을 정도로 바빴다. 레스토랑에는 에어컨을 가동한 상태였지만 직원들의 유니폼은 땀에 젖을 만큼 바빴다. 바쁜 식음료부 직원들을 도와주기 위해 예약석에서 얼음물을 서빙하고 나온 진경이 워터포트를 들고 베버리지 바로 걸어왔다.
“오빠, 예약석에서 반찬 더 달래.”
“지금 전부 정신없으니까 니가 좀 갖다 줘라.”
“아무리 내가 예전에 식음료 부서였지만 그렇게 부려먹기야?”
“미안 미안. 좀 도와주라.”
“으이그 내가 없으면 안 된다니까.”
투덜거리면서 사각쟁반을 든 진경은 사실, 작년까지 웨이트리스였다가 카운트 데스크 인원이 부족한 탓에 경리부로 부서를 옮겼다. 경력으로 따지고 보면 캡틴정도 되는 경력이기에 서빙이나 접객에 대한 업무도 탁월해서 바쁠 때는 큰 도움이 됐다. 메인음식인 꼬리곰탕 서빙이 마무리 될 무렵, 주방쪽 계단에서 그릇 깨지는 소리와 함께 여자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성진이 달려가 보니 그곳에는 꼬리곰탕을 가지고 내려오던 연희가 계단에 넘어져 있었다.
“연희 씨! 괜찮아요?”
“아, 어떻게 해..”
한식 서빙용 사각트레이와 엎어진 뚝배기 그리고 국물이 주변에 흥건했다.
“어디 다친곳은 없어요?”
성진이 연희를 일으키며 살펴보자 연희가 고통을 호소했다.
“아, 아..!”
다행히 큰 부상은 없었지만 뜨거운 곰탕국물 때문에 팔목에 화상을 입은 듯했다.
“다른 데는? 다리나 허리는 괜찮아요?”
“네, 괜찮은 거 같아요.”
성진은 화가 치밀었다.
“야! 캡틴!”
영진이 옆에서 어쩔 줄 몰라하며 서있었다.
“곰탕은 무겁고 위험하니까 남자직원들 시키라고 했잖아!”
“그거 제가 시킨 거 아니에요. 제가 반찬을 가져가야 해서 갔다 올 테니 놔두라고 했는데..”
그때 연희가 나섰다.
“캡틴님 잘못 없어요. 바쁜 거 같아서 얼른 해치우려고 하다가..”
“연희 씨는 왜 시키지도 않은 일을.. 이쪽으로 와요. 영진아 가서 구급함 가져와.”
영진이 구급함을 가지러 가고 성진은 연희를 데리고 백사이드로 갔다. 제빙기의 열고 와인 칠러에 얼음과 물을 적당히 담았다.
“여기에 손을 넣고 열 좀 식혀요.”
성진이 연희의 손을 잡고 와인 칠러에 넣었다. 곧이어 영진이 구급함을 가져다 주었다.
“생각보다 많이 데었네. 물집 생기겠어.”
성진이 속상한 듯 미간을 찌푸리며 구급함을 열어서 약과 붕대를 꺼냈다.
“고마워, 성진 씨.”
성진이 화들짝 놀라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쉿! 회사에서는 존칭을 쓰라고 했잖아요.”
“캡틴 갔어. 둘이 있는 거 알고 했어.”
“그래도 조심해야 해요. 손 이리 줘 봐요.”
성진이 물기를 닦아내고 연고를 바른 뒤 붕대를 감고 있었다. 붕대를 감던 성진이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고개를 들어보니 연희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다쳤는데 뭐가 좋다고 웃어요?”
“성진 씨가 날 챙겨주니까.”
“열 번 다쳤다가는 아주 난리 나겠네.”
“손목은 쓰리지만 성진 씨가 치료해 주니 기분 좋다. 살짝 흥분되네.”
“어어 점점.. 큰일 날 소리를. 너무 대담한 거 아니야?”
그때, 연희가 갑자기 입을 맞추었다.
“왜 이래 정말.”
“싫어?”
“아니 그게 아니고, 여기는..”
연희가 성진을 와락 끌어안고 키스를 했다. 그 바람에 얼음이 담긴 와인 칠러가 바닥에 떨어졌다. 성진이 가까스로 연희를 밀어냈다.
“안돼. 그만!”
백사이드에서 큰소리가 나자 홀에 있던 직원들이 달려왔다.
“무슨 일이에요?”
“아, 아니야 칠러가 떨어져서 그래. 가서 일해라 붕대만 마저 감고 갈게.
직원들이 다시 나가자, 성진은 연희에게 꾸지람을 하는 시늉을 하며 나머지 붕대를 마저 감았다.
“연희 씨는 지금 들어가. 다친 것도 그렇지만 유니폼이 얼룩져서 일을 할 수 없으니까.”
“베네치아에서 기다릴게. 끝나면 같이 가.”
“오늘은 안 돼. 집사람이 오늘 할 말 있다고 일찍 들어오래.”
“나 다쳤는데, 그냥 혼자 둘 거야?”
“연희야, 오늘은 정말 힘들어.”
“너무해. 나 손목이 이래서 씻지도 못하는 거 알면서.”
“시영씨 있잖아.”
“나 사실 얼마 전 방 얻었어.”
“뭐라고? 왜 말 안 했어?”
“시영이 언니 남자친구도 생겼고, 또 우리도 모텔로 전전하는 것도 싫고, 돈도 아껴야 해서 그렇게 결정했어.”
“아, 하지만..”
“부탁이야. 응?”
성진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난감했다. 오늘 집에 안 들어가면 나중에 일어날 일은 불보 듯 뻔했기 때문이었다.
“그럼 일단 내가 샤워만 시켜줄게. 이해해 줘.”
“칫, 알았어.”
연희에게 사복으로 갈아입으라고 보낸 성진은 예약문제 때문에 늦어진다고 음성 메시지를 남겼다. 그때 사복으로 갈아입은 연희가 성진을 바라보며 붕대가 감긴 손목에 입을 맞추곤 미소를 지으며 후문으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