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11화.
성진이 근무를 마친 후, 베네치아에서 기다리던 연희와 택시를 타고 갔다. 그 짧은 순간에도 연희는 성진의 옆자리에서 팔짱을 끼고 머리를 어깨에 기댄 채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성진 역시 그런 그녀가 싫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아내에게서 느끼지 못했던 따스함을 느꼈기에 행복했다. 택시에서 내린 곳은 호텔에서는 거리가 좀 있는 곳이었지만, 비교적 깔끔한 신축건물이 모여 있는 동네였다. 대로변에서 가깝기도 하고 골목도 가로등이 많아서 꽤나 밝았다.
“시영 씨랑 있었던 곳보다 동네가 밝아서 좋네.”
“그치? 잘 골랐지?”
“응.”
“그럼 칭찬해 줘야지.”
연희가 보채면서 장난스럽게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사람들이 보면 어쩌려고 그래.”
“남들이 뭔 상관인데. 다른 사람 눈치 보지 마.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우린 우리 생을 살아가면 되는 거야. 얼른..”
성진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마지못해서 입술을 가져다 대려 하자, 연희가 성진의 얼굴을 붙잡고 키스를 했다.
“이런 장난꾸러기.”
“칫 좋으면서.. 이쪽으로 와.”
연희가 성진의 손을 잡고 앞장섰다.
“오늘은 웬일로 맥주를 사자는 소리 안 하네?”
성진이 편의점을 가리키며 멈칫거리자 연희가 잡고 있던 손을 잡아당겼다.
“이젠 술에 취한 채로 당신과 만나고 싶지 않아.”
“오호, 무슨 바람일까?”
“뭐 생각나면 마실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해.”
“그래 좋은 생각이야.”
연희가 새로 얻은 방은 원룸이지만 신축건물이라 깔끔했다. 주방과 화장실도 따로 있었고 샤워 부스까지 있었다.
“온 지 얼마 안 되기도 했고 시간도 없어서 가구들이 없어. 일단 잠은 자야 하니 매트리스만 놨어.”
정말이지 아무것도 없이 매트리스와 프라이팬과 냄비하나가 전부였다. 하지만 주방에 식기세트가 두 세트, 칫솔도 두 개가 놓인 것을 보자 성진은 자신이 마치 신혼집에 온 듯 기분이 묘했다. 집 구경을 하고 있는 성진을 연희가 뒤에서 끌어안았다.
“뭐 해, 나 씻겨줘.”
“그래 어서 씻자.”
“옷 벗겨줘.”
“그래 이리 와.”
성진은 연희의 옷을 조심스럽게 하나씩 벗겨주었다. 그렇게 자신에게 정성을 쏟고 있는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연희가 성진의 얼굴을 두 손으로 잡았다.
“참 좋은 남자.”
연희가 가볍게 키스를 한 후 샤워부스로 들어갔다.
성진도 옷을 벗고 샤워부스로 들어가서 물을 틀었다. 잠시 후 따뜻한 물이 쏟아지면서 화장실은 따뜻한 수증기로 가득했다. 성진은 붕대가 감긴 연희의 손을 높게 들게 하고는 수건에 거품을 냈다. 연희는 아무 말 없이 고분고분하게 성진의 손짓에 몸을 맡겼다.
“무릎에 멍이 들었네. 아팠겠다.”
“아니 괜찮아.”
성진은 그녀의 몸 구석구석을 꼼꼼하게 거품 칠 했다. 간혹 갈비뼈 근처나 발바닥을 지날 때면 까르르 웃기도 했다. 그리고 목 주변을 지날 때면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눈길을 보내는 연희를 못 본 체 지나기도 했지만, 고마움의 표시로 가볍게 당하는 뽀뽀만큼은 피할 수 없었다. 거품 칠을 끝내고 샤워기로 온몸에 묻어있는 거품을 씻어내자 눈부시게 매끈한 우윳빛 피부가 성진의 눈에 들어왔다.
“머리도 감겨줘.”
“그래 숙여봐.”
연희가 머리를 숙이자 샤워기로 머리를 적신 후 샴푸로 거품을 냈다.
“아.. 시원하다.”
“이젠 얼굴을 들어봐.”
연희가 얼굴을 들고 눈을 감았다. 이번에는 성진이 그녀의 입에다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러자 연희는 눈을 감은 채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얼굴에 클렌징크림을 펴 바른 후 마사지하듯 얼굴을 씻어주었다. 맨얼굴의 그녀의 얼굴은 언제 봐도 질리지 않은 아니 오히려 순수한 귀여움이었다. 성진은 그녀의 입술에 키스를 했고, 그녀도 부드러운 입술로 받아주었다.
“자 이제 물기 닦자.”
성진이 수건으로 연희의 몸 구석구석을 꼼꼼하게 닦아주었다. 연희는 성진의 손놀림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어쩜 이런 남자가 있을까?”
“왜 새삼스럽게.”
“그러게 새삼스럽게 감동이네. 정말이지 이렇게까지 씻겨줄 줄은 몰랐거든..”
“내가 한 섬세하지. 하하..”
“주스나 콜라조차도 없는데 어쩌지? 사 올걸 그랬나.. 생수밖에 없어.”
“괜찮아 그거라도..”
두 사람은 생수를 한 잔씩 들이켜고는 매트리스에 나란히 누웠다.
“가기 전에 손에 붕대 한 번 더 갈아주고 갈게. 아침에는 불편하더라도 한 손으로만 세수해.”
“정말 가려고? 나 혼자 두고? 아침에 머리가 헝클어지면 머리 감아야 하는데..”
“정말 안돼. 미안하지만 가야 해. 다음에 더 좋은 시간을 위해서라도.”
“바보.. 세상에 다음이 어디 있어. 자긴 잘 모르지? 우린 지금을 살아가는 거야. 다음이란 없는 거야.”
“그래도 안돼.”
“흥!”
연희가 삐진 듯 등을 돌렸다. 성진도 아픈 연희를 두고 가기가 힘들었지만, 아내의 목소리가 마음에 걸렸다.
“성진 씨..”
“응?”
“혹시 바람 부는 언덕에 가본 적 있어?”
“바람 부는 언덕?”
“응. 제주도에 있는 용 눈이 오름이라고 있어.”
“아니 가본 적 없어. 여행이라고는 신혼여행밖에.. 아, 미안해.”
“괜찮아 내가 모르는 것도 아닌데 뭘.”
“그런데 거긴 왜?”
연희가 언제 그랬냐는 듯 몸을 돌리고 밝게 웃으며 성진을 바라보았다.
“우리 언제 시간 나면 거기 가자.”
“글쎄, 시간이 될까?”
“에그 또 저 자신감 없는 모습 싫어!”
“그게 아니라, 난 지배인인데 영업장에 두 사람이나 갑자기 같이 빠지면 스케줄도 그렇고 사람들이 눈치채지 않을까 해서 그렇지.”
“그거 알아? 절실하면 방법은 다 생겨. 핑계란 그만큼 절실하지 않다는 줄임말일 뿐이야. 우리의 사랑도 영원하다 믿으면 그 정도쯤은 아무것도 아니지.”
“음, 어렵네.”
“바부탱이. 어쨌든 약속한 거다?”
연희가 투덜거리며 침대에서 일어나 성진의 옷을 옷걸이에서 빼냈다.
“자! 가려면 어서가 내 맘 변하기 전에.”
“정말 미안해.”
성진이 일어나서 옷을 입었다. 그러고는 연희에게 입을 맞추고 나왔다. 성진은 택시를 타고 집으로 향했지만 마음은 다시 무거워졌다. 서둘러서 집에 도착하니 방에는 불이 아직 켜진 상태였다. 성진은 마치 전쟁터에 참전한 군인처럼 긴장감과 결의에 찬 마음으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