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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싸라기 Oct 20. 2024

릴리트 호텔을 떠나며

12화

12화.

싸늘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아내 앞에는 소주병이 놓여 있었다. 성진이 들어온 걸 알면서도 눈길을 주기는커녕 술잔에 눈길을 고정한 채 술을 따르고 있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성진의 인기척에 아내가 고개를 슬며시 들었다.

“아, 우리 남편이네. 우리 남편 얼굴이 저렇게 생겼구나.”

“지금 뭐 하는 거냐고!”

“보면 몰라? 술 마시는 중 이잖아.”

“지금 내가 그걸 몰라서 묻는 거야? 왜 그러고 있느냐고!”

아내가 마시던 술잔을 거칠게 내려놓았다.

“당신! 정말 몰라서 묻는 거야? 지금 시간이 몇 시야! 당신은 내 말이 우습지?”

“내가 놀러 다니 사람이야? 음성 메시지 남겼잖아.”

아내의 입 꼬리가 한쪽만 삐죽 올라가며 다시 술잔을 들었다.

“그래.. 늘 혼자만 바쁘시지. 그런데 무슨 호텔이 맨날 그렇게 바빠서 집에도 못 들어올 정도지? 대기업에 다니는 사람도 그 정도로 바쁘지는 않을 텐데.”

“너 그 비아냥거리는 말투 그만두지 못해? 내가 그렇게 우스워 보여?”

“아이고, 죄송합니다. 서방님 죽을죄를 지었네요.”

“그만해!”

성진의 고함으로 인해서 두 사람은 한동안 침묵했고, 드디어 아내가 입을 열었다.

“우리는 사랑이 필요해서 서로를 선택한 사람들이야. 하지만, 사랑을 줄 생각은 없지. 나 역시 마찬가지고.. 사랑에 대해서 인색하니까. 우리의 유일한 공통점이자 가장 큰 문제점이지.”

“난 오로지 당신의 관심과 따뜻한 말 한마디가 필요했을 뿐이야.”

“자신에 대해서 관대하군. 욕심이 없는 사람처럼...”

“당신은 늘 자신의 기준에 맞지 않으면 날 몰아세우기만 했어.”

“그래. 그랬다 치자. 우리의 관계에서 내가 당신을 존경할 만한 근거는 있었고? 부부관계에서도 내가 주도하는 것조차 원치 않았지. 당신은 여자가 순종하기만을 바라는 남자야.”

“사랑에 존경심이라는 전제조건이 필요한가?”

“적어도 남편이라면 아내의 의견도 존중해 주고 능력 또한 나아지는 게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당신은 늘 변함없는 그냥 평범한 월급쟁이에 부부관계도 늘 같은 체위야. 한마디로 젬병이지.”

“내가 당신에게 그 정도일 줄 생각도 못했네. 그래도 아직 애정이 남아있겠지 하고 생각한 나만의 착각이었나 보군.”

“응, 그래.. 착각도 정도가 지나쳤어. 이건 순진한 게 아니라 멍청한 거 아니야?”

“아.. 그렇구나. 나 혼자 내 생각에 갇혀 살아온 걸 이제라도 알게 해 줘서 고맙네.”

다시 두 사람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방안에는 술을 따르는 소리와 간간이 들려오는 메마른 한숨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여기가 우리의 갈림길 인가 보네. 그렇지?”

아내가 술잔을 내려놓으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게 적어도 우리에게 이런 갈림길이 나오리라 생각은 못했는데..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성진이 아내의 술잔을 가로채자 아내가 술을 따라주었다.

“자! 받아. 이게 내가 주는 마지막 잔이야.”

“....”

성진은 술잔을 받으며 아내를 바라보았다. 평온하면서도 눈가에는 쓸쓸함이 묻어있었다.

“후회하지 않겠어?”

“후회? 글쎄, 우리에게 아직 그런 감정이 남아있었나?”

아내는 술을 따르며 쓴 미소를 짓자 성진이 말했다.

“자신의 기준대로 상대를 평가하는 것도 잘못이지만, 상대를 외면하며 몰라주는 마음은 더 큰 잘못이야. 그 사람의 영혼을 말라버리게 하거든. 그래서 넌 사랑을 몰라. 그런 당신이 슬프고 그런 당신을 사랑한 내가 불쌍해.”

“당신 최근에 들어서 많이 달라졌네? 뭔가 당당해지고 예전의 당신 다운 모습이 보이기도 하는 것 같아. 여자라도 생긴 거야?”

성진은 아내의 말이 서글프게 들렸다. 가까이 있는 여자는 분명히 자신의 아내인데, 생전 처음 보는 여자를 대하는 듯했다.

“그래... 맞아.”

아내는 미소를 짓고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지 그게 맞는 거지. 어때 나보다 예뻐? 나보다 예뻤으면 좋겠다.”

“세상에는 자신을 대신할 사람은 없어. 각자의 나다움이 있는 거지.”

“오호, 깊이가 있는 말이네.”

“그만하자. 내일 얘기해.”

“으음.. 그건 아니지. 우리 오래간만에 한번 할까? 오늘 당신의 모습이 왠지 끌리는 걸.”

“그건 아니야. 지금 그럴 기분도 아니고..”

“부탁이야 우리도 해피엔딩으로.. 어때? 대신 이번엔 내가 원하는 대로 해주기야. 마지막 선물.. 뭐 그런 거라고 생각해도 좋고.”

“싫어!”

성진이 자리에 일어나려 하자, 아내가 성진의 어깨를 누르며 달려들었다.

“왜, 마음이 멀어지면 몸도 멀어져서? 남자들은 마음이 가지 않아도 여자와 관계를 할 수 있다면서. 아니면, 내가 그 여자가 아니라서?”

아내가 기습적으로 성진에게 입을 맞추었다. 성진이 밀치려 했지만 너무나도 완강했다. 이내 아내가 고개를 들고는 성진의 와이셔츠를 강제로 벗겼다.

“너 정말.. 하지 마!”

참다못한 성진이 아내를 밀쳐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가라 가! 그년한테.”

이제는 끝을 향해가는 아내를 바라보며 더 이상은 안 되겠다는 판단이 들자, 성진은 문을 박차고 나왔다. 성진의 등 뒤로 아내의 울부짖듯 고함치는 소리가 들렸다.

“잘 가라! 박 성진!”

한참을 쫓기듯 뛰어나온 성진은 어두워진 골목에 쪼그리고 앉았다.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 때문에 달빛도 동네의 야경도 얼룩져 있었다. 간간이 들려오는 가족들과의 대화소리, 예민해져 있는 강아지의 짖는 소리, 잘 익은 김치로 끓인 김치찌개 냄새가 성진을 더욱 처량하게 만들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했다. 이런 몰골로 연희에게 갈 수는 없었다.

성진은 무작정 걷고 또 걸었다. 잠시 후 대로변으로 나오자 편의점이 눈에 들어왔고, 승대가 생각이 나서 곧장 공중전화 부스로 갔다.

“어, 이 밤에 어쩐 일이야?”

“퇴근했지?”

“그래. 아까 들어왔지.”

“시간 돼?”

“왜? 무슨 일 있어?”

“술 한 잔 하자.”

“술? 이거 이거 또 뭔 일 있구만. 그러면, 편의점 건너편에 생고기 집으로 갈 테니까 잠깐 기다려.”

“그래, 알았어.”

잠시 후, 지글거리며 익어가는 돼지고기가 올려진 고기 불판을 사이에 두고 승대는 성진의 넋두리를 말없이 듣고 있었다.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

“모르겠어. 내가 그렇게 잘못한 건가? 좀 더 참아야 했나?”

승대가 성진의 술잔에 술을 따라주며 말했다.

“잘은 모르지만 요즘에 편의점 앞으로 지나가는 너를 보면, 뭔가 달라진 것 같아.”

“내가? 어떤 게?”

“글세, 뭐랄까.. 넋이 나간 듯 헤매는 모습이 무슨 좀비 같기도 하고, 몽유병 환자 같기도 했어.”

“내가? 에이, 무슨 말이야. 내가 언제 그랬어.”

“진짜야! 몰랐단 말이야? 난 말 못 할 일이라도 있는 줄 알고 일부러 모른 체했는데.”

호텔에서도 그렇고 승대에게도 비슷한 말을 들은 성진은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그동안의 연희와의 비밀연애 때문이라고 생각하고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의 고리를 끊어 버렸다.

“아무튼 잘 생각해. 아무리 요즘 세상에 이혼이야 큰 흠이 아니라고는 하지만, 감정적으로 결정할 문제는 아니잖아.”

“우린 너무 멀리 온 것 같아.”

“음.. 어쨌든 네 인생은 네가 결정할 문제니까. 아무리 친구라도 더 이상의 조언은 의미가 없겠다. 난 너의 마음이 그리고 인생이 편해졌으면 해. 그것밖에 말 못 하겠다.”

“고맙다. 자, 한잔 받아.”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주거니 받거니 하며 술을 마신 후 헤어졌다. 길을 걸어가던 성진의 목덜미 사이로 찬바람이 끼어들자, 성진은 몸을 부르르 떨며 옷깃을 여미었다. 계절은 그렇게 가을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발끝에 걸리는 노랗고 붉은 낙엽들이 성진의 마음을 더욱 쓸쓸하게 했다. 그때 주머니 속에서 삐삐의 진동이 느껴졌다. 성진이 삐삐를 보니 1010235가 찍혀 있었다. 

“연희.”

성진은 삐삐를 손에 꼭 쥔 채 택시가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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