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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싸라기 Oct 20. 2024

릴리트 호텔을 떠나며

최종화

13화(최종화)

성진은 기억을 더듬으며 연희의 집 앞에 도착한 후 망설임 없이 초인종을 눌렀다. 그러자 안에서 연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세요?”

“나야! 연희야.”

문이 열리자 연희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성진을 바라보았다.

“어? 어떻게 된 거야?”

성진은 연희를 보자마자 와락 끌어안았다.

“뭐야? 무슨 일 있어? 어머 술 마셨구나. 얼마나 마신..”

성진이 키스를 하자 연희는 직감적으로 무슨 일이 생겼구나 하고 생각했다.

“일단 들어와.”

어두운 방안에는 스탠드 조명이 매트리스를 은은하게 비추고 있었다.

“자, 여기 물 좀 마셔.”

성진은 물 잔을 받아 들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어떻게 된 거야?”

“나.. 이혼해야 할 것 같아.”

“왜 갑자기..”

“더 이상은 힘들 것 같아.”

연희는 아무 말 없이 성진을 바라보았다.

“그게 당신의 마음이면 그렇게 해.”

성진이 연희의 두 손을 잡고 애원하듯 말했다.

“연희야. 내 곁에 있어 줄 거지?”

“그럼, 당연하지. 우리는 하나라고 했잖아.”

“고마워. 사랑해.”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뜨거운 입맞춤을 나눴다. 그러고는 은은한 조명아래서 한 몸이 되어 뜨겁게 사랑을 나누었다. 성진의 몸짓은 다른 날과 다르게 때론 거칠게 때론 뜨겁게 연희의 온몸을 파도가 몰아치듯 탐닉했다. 연희도 마음을 다해서 성진을 보듬으며 받아주었다. 파도가 잔잔해지듯 성진의 열정이 가라앉고 차분해진 두 사람은 서로 끌어안은 채 만족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성진 씨는 참 사랑스러워.”

“내가? 어떻게?”

“항상 날 기쁘게 해 주니까. 거친 듯해도 나를 배려하려는 마음이 느껴져서 너무 좋아.”

“당신이 날 그렇게 만든 거야.”

“정말 그렇게 생각해?”

“그럼, 당연하지.”

“그렇게 생각한다면 고마워. 우리 기념으로 술 한 잔 할까?”

“그거 좋은 생각이야. 내가 가서 사 올게.”

“응. 조심히 다녀와.”

“알았어.”

잠시 후, 두 사람은 맥주를 마시면서 앞으로의 계획과 집안을 어떻게 꾸밀지 상의하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마치 신혼부부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그렇게 두 사람의 동거 생활이 시작되었다. 드디어 그렇게 뜨거웠던 여름의 태양도 서서히 힘을 잃어가고 하늘에서 물감을 뿌린 듯 울긋불긋하게 낙엽이 물들어가는 계절이 지나서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다. 성진은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한 사랑을 느끼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성진은 하루도 빠짐없이 가슴 벅차고 흥분되는 연희와의 사랑으로 기쁨이 충만했다. 연희 말대로 정말 새로 태어난 기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전날 밤에도 연희와 기분 좋게 술을 마시고, 사랑을 나눈 뒤 곯아 떨어진 상태에서 삐삐가 울렸다. 성진은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삐삐를 바라보았다. 화면에는 828282라는 다급한 숫자와 음성메시지가 있었다. 성진은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시간을 보고는 화들짝 놀랐다. 출근시간이 지났기 때문이었다. 그러고는 매트리스에 누운 채 옆을 보았지만 연희가 보이지 않았다. 

“어디 간 거지.. 설마 나 혼자 두고 출근했나?”

성진은 부리나케 옷을 챙겨 입고 공중전화로 가서 호텔로 전화하자 진경이 받았다.

“오빠! 어떻게 된 거야?”

“아, 미안 미안 어제 과음을 좀 했는데..”

“지금 총지배인님 오셔서 찾고 난리 났어. 그리고 오늘 예약 있다고 왜 말 안 해줬어? 하여튼 빨리 와!”

성진은 택시를 타고 호텔로 향하면서 말도 없이 먼저 출근 한 연희가 서운했다. 성진은 호텔뒷문으로 허둥지둥 뛰어 들어가자, 성진을 발견한 총지배인이 배버리지 바 앞에서 호통을 쳤다.

“너 뭐하는 놈이야!”

“죄송합니다.”

“일단 예약부터 처리하고 이야기하자.”

“네..”

직원들이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예약손님이 들이닥친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서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성진은 카운트 데스크에 서있는 진경에게 다가갔다.

“아, 뭐야 오빠 정말..”

“미안해. 예약손님은 전부 온 거야?”

“다행히 아직 전부 오진 않은 상태고, 예약음식은 총지배인님이 전달해서 지금 주방에서 급하게 만들고 있어. 다행히 텐더로인 스테이크 코스라서 다행이야.”

“휴.. 아참 그런데 연희 씨는 어디 갔어?”

“연희?”

“그래. 안 보이네.”

“연희가 누군데?”

“연희 말이야. 우리 식음료 직원.”

“무슨 소리야. 우리 호텔에 연희라는 직원은 없어. 술이 덜 깨셨나..”

성진은 머리를 망치로 얻어맞은 듯 멍했다. 

“장난치지 말고, 어디 있어?”

“도대체 왜 그래? 없는 사람을 찾고..”

“야! 지금 장난칠 때야?”

성진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진경도 물러서지 않았다.

“왜 소리를 지르고 난리야! 말이 안 되는 소리까지 하고, 정말 정신이 어떻게 된 거야? 이혼하더니 정신 줄까지 놓은 거야?”

“이 자식이 정말 말 함부로 할래?”

팔짱을 낀 채 노려보던 진경이 성진의 팔을 붙잡았다.

“오라버니 이리 와 봐. 캡틴님! 여기 데스크 좀 잠깐 봐줘요.”

진경은 성진을 데리고 건물 밖으로 나왔다. 

“자, 일단 담배하나 줘봐.”

성진이 씩씩거리며 담배를 꺼내주자 진경이 담배연기를 길게 뱉어내고 질문했다.

“오빠, 어떻게 된 거야?”

“뭐가?”

“연희라는 사람은 또 뭐고 오빠답지 않게 매번 지각에 도대체 뭔 일이 있냐고.”

“연희를 모른다니 하는 소리지 어제까지도 같이 일한 동료인데. 아 왜 입사해서 생일파티도 하고, 단체예약 때 곰탕그릇 엎어져서 손목에 화상을 입기도 했잖아.”

“몇 달 전 입사한 언니는 은영이 언니고, 쟁반이 엎어져서 다친 사람은 오빠잖아.”

성진은 소매를 걷고 자신의 손목을 봤다. 물집이 생겼던 화상자국이 선명히 보였다. 

“봐 봐. 보이지? 오빠가 계단에 미끄러져서 다치고는 무슨 소리야. 캡틴님이 치료해 준다고 해도 극구 말리면서 혼자 백사이드에서 응급처치하고 유니폼이 얼룩졌다고 조퇴까지 했으면서..”

성진은 진경의 말에 몸을 가누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오빠! 괜찮아?”

“그러니까 그때 그 일은 내가 화상을 입은 것이고, 연희라는 사람은 없는 사람이란 거야?”

“도대체 그 사람이 누구길래 그래.”

성진이 비틀거리며 걸어가자 진경이 부축해 주었지만 성진은 거칠게 뿌리쳤다. 그러고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진경을 바라보았다.

“나... 먼저 들어갈게 가볼 곳이 있어. 총지배인님한테는 내가 전화할게.”

“지금 가면 어떻게 해! 이러다 정말 잘려!”

진경의 부르는 소리를 듣는 둥 마는 둥 하고는 택시를 타고 연희의 집으로 갔다.      

허겁지겁 달려서 연희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방안을 뒤졌다. 하지만, 어디에도 여자의 흔적은 없었다. 성진은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바닥에 주저앉아서 골똘히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하나둘씩 떠오르는 기억들에 성진은 넋이 나갔다. 혼자 레스토랑에 식사를 하고, 혼자 공원과 거리를 돌아다니며 마치 데이트를 하듯 혼잣말을 하던 자신의 모습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모텔을 전전하며 혼자 자위를 하며 아내에 대한 원망과 외로움에 몸부림을 치던 자신의 모습. 급기야 아내와 헤어지고 얻은 조그만 원룸에서 자유를 만끽하며 술에 찌들어 지내던 시간들이 전부 기억이 났다. 게다가 그동안 주변 사람들과 승대가 했던 평소 자신의 모습과 다르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됐다. 성진은 비틀거리며 밖으로 나와서 공중전화 부스로 갔다. 그러고는 총지배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총지배인님. 저 박 성진입니다.”

“야! 너 어쩌자는 거야!”

“죄송합니다. 일이 좀.. 있어서요.”

“일단 들어와. 와서 말해!”

“아니요. 죄송합니다만.. 이제 그만둬야겠습니다.”

“뭐야? 그렇다고 마무리를 이런 식으로 하나?”

“정말 죄송합니다. 그간 감사했습니다.”

“야! 성진아.”

성진은 전화를 끊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모든 것이 나의 착각이었고 환상이었구나 싶은 생각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때, 하늘에서 눈송이가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하자 성진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게다가 한편으로는 환상 속에서 잠시 만났던 연희가 고맙게 느껴지며 마음도 홀가분함을 느꼈다.

“이제 떠나자. 이 세상도.. 릴리트도.”

그렇게 모든 것을 포기하는 마음이 들자 연희의 말이 떠올랐다.

“혹시 바람 부는 언덕에 가본 적 있어?”

성진은 세상과의 작별할 장소로 연희와 약속한 장소를 선택하고 떠날 준비를 했다. 눈이 내리기 시작했기에 이륙시간이 다소 지연되어 제주도에 도착했을 때는 늦은 오후였다.

용 눈이 오름은 워낙 유명해서 택시기사에게 말하자 바로 안내해 주었다. 겨울이라 사람도 드문 곳이었지만 산책로로 걸어가는 길에는 억새풀들이 손바닥을 펼쳐서 성진의 방문을 반겨주었다. 눈발은 잦아들었지만 연희가 말 한대로 일명 바람 부는 언덕답게 바람이 거셌다.

낮은 산등성이와 탁 트인 벌판은 성진의 가슴을 후련하게 해 주었다. 게다가 해 질 녘 넓게 자리한 구름 아래로 오렌지 가루를 뿌려 놓은 것처럼 노을이 아름답게 자리하고 있었다.

그렇게 걷다 보니 작은 벤치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성진은 벤치에 앉아서 그동안의 자신의 인생을 찬찬히 생각했다. 영사기 필름처럼 하나씩 지나가는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아내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인지, 이런 모습 때문에 아내가 그렇게 변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자신의 잘못도 없지 않다고 생각이 들자, 씁쓸한 미소와 함께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러고는 주머니에서 미리 준비해 온 칼을 꺼냈다. 주변에는 다시 눈송이가 흩날리기 시작했고 노을도 점점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Hey, stop it."

성진이 놀라며 고개를 돌려보니 한 여자가 손을 뻗으며 말렸다.

“Don't do that. Please."

성진은 영어로 말하며 서있는 여성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연희와 너무 닮았기 때문이었다.

“연희?.. 연희니?”

“아니요. 전 미국인. 한국말.. 조금.. 해요. 하지만 그런 거 안.. 좋아요.”

성진은 벤치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갔지만 손에 칼이 들려있자 그녀가 뒷걸음쳤다. 성진이 그것을 알아채고는 칼을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미안해요. 여긴 이 시간에 어떻게 오셨어요?”

“아.. 제주도 여행 왔어요. 어제 이곳에 도착.. 했어요. 그리고 이곳 꿈을 꿨어요. 그리고 아... 슬펐어요. 누군가 여기서... 슬프게.. 울었어요. 그래서... 오고 싶었어요.”

“외모는 한국 분 같은데.. 미국에서 태어나셨나요?”

“네, 교포입니다.”

“혹시 이름을 물어봐도 되나요?”

“이름?..”

“네. 이름.. name."

“오.. 저는 Evelyn Nicole Lee. “

“아.. 저는 박 성진입니다.”

“성.. 진..?

“네 맞아요. 성진.”

“저는 에이블린. 이브..라고.. 불러요.”

성진은 또 한 번 놀라고 말았다. 생김새도 연희와 너무 똑같았지만, 언젠가 연희에게 이브 같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서있자 이브가 말했다.

“조금 앉아서.. 우리... 말, 아니 대화? 할까요?”

“좋아요. 그런데 저는 지금 제 자신과 사이가 안 좋아요. 그래서 당신에게 좋은 인상을 줄 수 없어요. 그래도 괜찮겠어요?”

“음.. 괜찮아요. 그건.. 문제.. 없어요. 지난.. 모든 건 용서.. 하고 자신을 사랑하세요. 내가.. 도와줄게요.”

“이브.. 만나서 반가워요. 그리고, 여기 와줘서 고마워요.”

“나도.. 반가워요. 그리고.. 음... 다행..이에요. 늦지.. 않아서.”

이브가 성진을 보며 미소를 짓자 더욱 연희의 얼굴과 똑같았다. 그런 이브의 모습에 성진은 너무나 반가워 끌어안을 뻔했다. 두 사람은 상대방에게 궁금한 것과 왜 이곳에 이렇게 있는지 등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느덧 성진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고, 눈송이가 흩날리는 벤치에는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있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이 시간, 바람 부는 언덕에는 이브와 성진 두 사람만이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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