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나무

겨울 나무

by Dahl Lee달리

오늘 아침엔 평소보다 30분 정도 일찍 출근했다. 한의원 뒤편의 공원을 산책하다 들어갈까 싶었다. 공원에는 오래된 매화나무가 있다. 그동안은 정신이 없어 지나쳤었는데 오늘 보니 어느새 꽃이 피어있다.


이 동네는 내가 초등학교 2학년때부터 살던 동네다. 첫 남자친구를 사귀고 엄마 눈을 피해 이 공원에서 데이트를 했었다. 또 어느 어린 시절의 나는 다이어트를 한답시고 이 공원을 열 바퀴씩 걷기도 했다. 살은 잘 안 빠졌지만..(다이어트는 식이야! 바보야!) 그 모든 시절에 저 매화나무가 있었다.


매화는 뼈대가 참 독특하다. 검은 뼈대가 울퉁불퉁한 느낌으로 기괴하게 꺾이며, 비틀리며 뻗친다. 줄기의 표면(수피)도 매끄럽지 않고 거칠다. 그래서 겨울에 매화는 유난히 앙상하고 외로워 보인다. (나만 그런가? 하하) 벚나무는 겨울에도 참 단아하고 품위가 있는데 말이다. '사군자'에 매화가 들어간다지만, 나는 그렇게 느껴왔다. 겨울에 앙상한 매화를 보면 인생 풍파가 많게 자란, 자격지심 많은, 여기저기 꺾이고 부러진 외로운 사람을 보는 기분이다.


일전에 <겨울나무>라는 시를 쓴 적이 있다


겨울나무는

뼈를 내보이며 서있다


옷을 껴입은 사람들이

뼈나무 옆을 지난다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은 얼굴로


나무는 이야기한다

오해가 깃들 수 없는 방식으로


그러나

나무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은

나무를 들으려는 사람뿐이다


잎을 떨어뜨리지 않고는 도저히 살 수가 없었다

나무의 목소리이다


우리는 다 다르게 춥다


어떻게 다를까

같은 추위에도

옷을 껴입어야 살 수 있는 사람과

뼈를 보여야 살 수 있는 사람은


못나고 모진 옆집 여자는 아이를 버렸다고 하고

본데없이 자란 어느 집 아이는 도둑질을 했다더라


나무를 듣지 않는 사람들이 만든

말의 껍질이

나무에 돌돌 말린다


마침내

마지막 잎마저 떨어뜨리고

더 추워지기를 선택하는

나무


뼈나무를 닮은

사람 곁을 지났다


마지막 옷까지 벗어버리고

붙박여

그저 떨고 있는

사람

곁을 지났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를 세련되게 포장하고 산다. 나에게는 그들이 따뜻한 옷을 입은 사람들처럼 느껴진다. 상처받기 쉬운 자신의 속마음은 안쪽에 잘 모셔 두고, 사회적 자아로 성숙한 사람의 역할을 연기한다. 그런 성숙한 역할 놀이는 그들을 보호하는 또 한 겹의 옷이 된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유난히 거칠고 날이 서 있다. 자신의 뒤틀린 인격을 감추지 않는다. 누군가 작게라도 상처를 건드리면, 포효하며 과민하게 반응한다.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에게 질겁한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나에게는 그들이 마치 피가 뚝뚝 흐르는 고기같이 느껴진다(나는 거의 채식인간이다). 그렇게 거칠고 날 서 있는 사람들의 주변엔, 그래서 사람들이 오래 머물지 않는다. 때문에 그들은 더 외로워진다.


나는 자칭 '경청자'이기도 하고, 부모님께서 물려주신 타고난 공감능력덕에(푸하하) 그 마음을 조금은 읽을 수 있다. 그 사람은 그런 방식으로 자신만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 딴에는 오해가 깃들 수 없는 분명한 방식으로. 그러나 듣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은 결코 들을 수 없는 이야기를.


세상은 겨울같이 추운 곳이다. 누구에게나 추운 곳이다. 어느 누가 특별히 더 불행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불행을 쪼개 맞든지, 한꺼번에 쳐맞든지의 차이가 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렇게 벌거벗듯 상처받은 자아를 드러내고 덜덜 떨며 세상을 걸어간다. 추위와 정면으로 맞서면서. 다른 사람들은 옷을 껴입고 자신을 보호하며 걷는 세상을 말이다. 옷을 껴입은 사람들은 그렇게 추운 사람들을 보며 알지도 못하는 말을 얹는다. 속사정도, 그 처절한 마음도 모르면서. ( 못나고 모진 옆집 여자는 아이를 버렸다고 하고 / 본데없이 자란 어느 집 아이는 도둑질을 했다더라. 허허. 이런 '카더라'가 알고 보면 얼마나 우스운지! )


뼈나무에게는 옷이 아닌, 그들이 지어낸, 함부로 지껄이는 말의 껍질이 돌돌 말린다. 상처받은 나무는 마지막 남은 잎마저 떨어뜨리고 한 겹 더 추워지기를 선택한다. 그것이 추위를, 닥치는 불행을 대하는 그가 아는 유일한 방식이다. 피가 줄줄 흐르는 날 것의 상처를 활짝 드러내는 것.


나는 그 시를 통해 뼈나무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여기에, 당신의 정직한 고통을 깊이 응시하는 눈이 있다고. 그것이 조금이나마 위로가 될지 모르겠지만.



겨울에 가장 먼저 피는 꽃이 매화다. 아직 이렇게나 추운데, 매화는 또 홀로 외롭게 꽃을 피운다. 꽃은 수분(sex)을 위해서 존재한다. 수분을 도와줄 곤충도 아직 많이 활동하지 않는데 왜 이렇게 일찍 꽃을 피우는 것일까? 매화는 바보가 아닐까?


그런데 이렇게 혼자 꽃을 피워놓고 있으면, 틈새시장을 공략하기가 쉽다고 한다. 따뜻한 봄이 되어 수많은 꽃이 한꺼번에 피면 벌과 나비 같은 매개 곤충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이 매우 치열해진다. 매화는 차라리 곤충이 귀한 시기를 독점하겠다는 전략을 택한 것. 비록 곤충의 수는 적지만, 그 시기에 깨어있는 소수의 곤충은 배고픈 상태라 매화의 향기와 꿀에 강력하게 이끌리게 된다. 그래서 겨울에 피는 꽃은 유난히 그 향이 짙다. 멀리에 있는 소수의 곤충을 강한 향으로 유인해야 하기 때문이다.


매화와 벚나무, 옷을 절대 벗지 않는 사철나무가 모두 어우러져 지구라는 행성의 생태계를 구성하고 있다. 자연과학을 좋아하는 내게는 모두가 참 흥미롭다.


오늘 공원의 매화꽃은 참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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