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랍게도, 이곳의 삶은 그럭저럭 살만했다
그날 이후로 머지않아 우리는 연인이 되었다. K는 헌신적인 연인이었다. 그는 늘 나를 돌봐주었다. 그러고 나서 이곳의 삶은 견딜만한 것이 되었다. 함께 식사를 하고 눅눅한 이불을 함께 덮고 그의 품에서 잠들 때면 평범하고 안락한 행복을 느꼈다. 붕괴 전에는 깨닫지 못했던 소중한 행복이었다. 나는 그의 모든 구석을 깊이 관찰했다. 그의 울리는듯하면서도 문장을 마칠 때는 약간 쉰 듯 변하는 목소리를 주의 깊게 들었다. 예민한 검지를 가지고, 틈날 때마다 K의 긴 손가락부터 시작해서, 부드러운 부분과 딱딱한 부분까지 굴곡과 피부의 촉감을 느끼며 온몸을 느리게 쓸어보았다. 그러면서 그의 존재를 실감했다.
우리가 알아왔던 수년간 그는 그저 나의 많은 지인 중에 하나였다. 여기에 갇히고 나서야 K는 박식하고 침착한 사람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나는 늘 철없는 소년 같은 타입을 좋아했었다. 그는 소년이기보다는 오히려 아버지 같은 타입이었다. 하지만 어떠랴. 그런 면 때문에 오히려 그는 나에게 큰 위안이 되어주었다. 마음이 흔들리며 여려질 때마다 단단한 것이 사무치게 그리웠다. 딱딱한 그의 등에 얼굴을 묻고 숨을 쉬기만 해도 진정이 되었다. 그에게 나는 어떤 쓸모가 있을까? 나는 자주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에게 혹시 징징거리거나 불안을 전가하거나 하지는 않은지 스스로를 점검했다.
이 건물의 신기한 점은 수도와 전기는 계속 공급된다는 점이었다. 각종 식재료도 그득하게 재고가 충분히 있었고, 판매되던 물품 중에 식물재배에 쓰는 LED광원과 각종 원예용품이 있기에 농사도 가능했다. 비록 영원할 수는 없겠지만.
놀랍게도, 이곳의 삶은 그럭저럭 살만했다. 무엇보다도 추위와 더위가 없었고, 식량 배급도 충분해서 누구도 굶주리지 않았다. 사람들은 쇼핑몰 안의 각종 가구를 이용해서 자기들만의 작은 공간을 꾸몄다. 나도 가구 몇 가지를 배당받았지만, 그보다는 텐트 하나를 선택하고 주로 그 안에서 지냈다. 텐트 안에 누우면 캠핑을 온 것처럼 안락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나는 주로 바깥세상 사람들이 오가는 걸음을 볼 수 있는 창가에서 지냈다. 이곳의 일상은 단순하고 반복적이었다. 사람들은 게임을 하기도 하고, 오래된 영화를 보기도 했고, 운동을 하기도 했다. 저마다 삶을 흘려보내기 위한 다양한 소일거리를 찾아 거기에 골몰했다.
나는 이 안에 들어와 먹는 즐거움을 난생처음으로 발견했다. 어느 음식도 맛있다고 느껴지지 않는 것은 나의 평생의 고질적인 문제였다. 식욕이 곧 삶의 욕구라는데, 바깥세상에서 나는 어느 음식에도 즐거움이나 맹렬한 갈망을 느껴본 적이 없었고. 나의 삶의 태도 또한 나의 식욕처럼 늘 미지근했다.
사람들은 이곳에서의 삶을 체념하고 나서 곧, 이곳의 음식 저장량과 우리의 평균 수명과 소비하는 음식량을 계산해서, 이안에서 누군가 새로운 아이를 낳지 않는 한 우리 모두가 이곳에서 굶주리지 않고 여생을 보낼 만큼의 음식이 있음을 계산해 냈다. 우리는 모두 기꺼이 임신 출산을 하지 않으리라는 맹세를 했다. 그리고 얼릴 수 있는 신선식품들은 모조리 얼리고, 날마다 일정량의 음식을 배급했다. 배급량은 언제나 충분했지만, 어쨌든 새로 생산되는 것은 사람들이 직접 기르는 소량의 식물뿐이었다. 음식은 언젠가는 동이 날 것이다. 그런 기묘한 결핍감이 나의 식욕을 자극한 것 같았다.
이곳에서 먹은 찐 감자는 내가 밖에서 먹은 어떤 음식보다 더 천상의 음식이었다. 나는 껍질을 벗긴 감자를 포슬포슬하게 쪘다. 숟가락으로 살짝 누르기만 했는데 부드럽게 으깨질 정도로 부드러웠다. 가슴을 저미는 향기가 났다. 나는 감자에 설탕을 두 스푼 뿌리고 숟가락으로 정성스럽게 골고루 으깼다. 이건 엄마가 자주 해주시던 음식이었는데 나 스스로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맛있다고 생각한 몇 안 되는 음식이었지만, 그걸 직접 만들 만큼의 의지는 없었던 것이다. 나는 이곳에서 이 감자요리를 감자를 배급받을 때마다 몇 번씩이나 만들어 먹었다. 잠자려고 누워서도 자주 그 요리를 생각하며 입맛을 다셨다.
이 안에서 가장 빨리 적응을 한 것은 의외로 노인들이었다. 애초에 그 수가 많지 않았던 노인들은 금방 자기들끼리 친해졌고 일상을 회복했다. 개인마다 할당된 조리도구로 모여서 함께 식사 준비를 했다. 수다를 떨며 같이 식사를 하고, 취미를 나누고, 자주 함께 운동을 했다. LED를 이용한 농사에도 열심히였다. 내가 밖에서 종종 만났던 노인들보다 그들은 더욱 활동적이고 의욕적으로 보였다. 노인 문제의 큰 축이 고독과 빈곤이라던데, 이 안에서는 적어도 고독하고 빈곤해 보이는 노인은 없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는 차차 답답함과 괴로움보다는 자유로움을 느끼는 날이 더 많게 되었다.
밖에서 나를 괴롭히던 일상들이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 몸단장을 하고 직장에 나가 일을 하는 단순한 과정마저 숨 막히게 무겁고 도저히 통과하지 못할 긴 터널처럼 느껴졌다. 나는 내 인생의 단 한순간도 비범하지 못한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 평범한 일상마저도 내게는 버거웠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눈을 뜨면 머릿속에 하루에 일어날 일들을 그려본다. 자리를 정돈하고 몸을 씻고 옷을 입고, 내게 주어진 역할을 하러 밖으로 나가서 자리마다 주어진 역할을 묵묵히 수행한다. 자리마다 알맞은 말들을 꾸며내서 천연덕스럽게 말한다.- 아침마다 나는 절대로 그 일들을 해낼 수 없을 것 같다는 기분을 느끼며, 시체가 무덤에서 일어나듯 억지로 몸을 일으켰었다.
이곳에서의 삶이 괜찮게 느껴진 것은, 이곳에서 최초의 죽음을 겪고 나서였다. 머리가 이미 하얗게 세고 등도 굽고, 몸이 종잇장 같이 가벼워 보이는 할머니였다. 그녀는 온몸의 세포들이 이미 버석하게 마른 것처럼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아 보였다. 할머니는 어느 날부터 식사를 잘하지 못하고 사람들이 가져다주는 죽이나 수프를 먹었다. 그리고 이윽고 전혀 먹지 못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아침 영영 일어나지 않고 말았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죽음이었다. 죽은 할머니의 몸은 커다란 상자에 담겨 냉동창고로 옮겨졌다. 아름다운 조화와 함께.
그 할머니의 마지막은 몇 년 전 우리 엄마의 마지막과는 많이 달랐다. 엄마는 위암으로, 아주 오랫동안 병원에서 투병하시다가 돌아가셨다. 엄마의 유일한 가족인 나는, 하필 출장에 가있어서 임종도 지키지 못했다. 위독하시다는 연락을 받고 병원으로 갔을 때는 이미 돌아가신 후였다. 우리 엄마는 평생을 억척스럽게, 삶에 투쟁하며 살았다. 그런 엄마는 병원에서 의식이 없는 상태로 오래 혼자 계시다가, 쓸쓸하게 돌아가셨다. 이곳에서 돌아가신 할머니는 비록 가족은 아니었지만 임종 직전까지 친구들과 이웃들의 넘치는 관심과 배려를 받았다.
-붕괴(3)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