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의 나 그리고 그때의 우리

by 이작가

밤사이 눈이 왔다.

새벽형 사람인 남편은 새벽부터 일어나 조용조용 자기 일을 한다. 아마 사랑하는 부인의 단잠을 깨우고 싶지 않아서일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다. 그런 사람이 눈이 왔다며 커튼을 연다. 밖은 여전히 깜깜하다. 가로등에 앞에서만 샤랑샤랑 내리는 눈이 보인다.


"어, 진짜 눈 왔네. 온다고 온다고 하고선 안 오더니."


내 마음속 깊은 곳에 다소곳이 자리하고 있는 감정이라는 것이 폭발해 "어머, 어쩜 눈이 오네. 오빠, 저 눈 좀 봐. 어쩜 저렇게 예쁘게 올 수 있지? 오빠, 와서 봐." 하고 호들갑을 떨어야 할 타이밍인데. 그 녀석 오늘 피곤했나 보다. 지치고 힘든 몸을 건사하느라 마음의 푸석함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피곤한 몸을 위해 조금 더 자고 일어나니 아침이 밝았다.


진한 커피 한 잔을 들고 베란다에 나가보니 이른 아침부터 아이들이 모자며 장갑으로 중무장을 하고 놀이터에서 뛰어다닌다. 까르르 웃는 소리가 기분 좋다. 부족하지 않게 하지만 또 과하지도 않게 소담하게 내리는 눈이 예쁘다. 잠을 자고 일어났더니 예쁜 눈도 눈에 들어온다. 생각해 보면 몸이 건강해야 세상을 바로 볼 수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운동을 열심히 해야겠다.


2000년 겨울. 남편과 오늘부터 1일을 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가 안타깝게도 기말고사 기간이었다. 많이 추웠고 밤새 눈이 많이 왔다. 새벽 4시 선배에게 전화가 왔다.( 그때는 오빠라고 부르기 어색해 선배라고 불렀다. 음.. 뭐야 뭐야 설레게..) "지금 너 데리러 집 앞으로 갈 테니까 얼른 준비해." 헉. 지금은 새벽 4시다. 아빠가 알면 불호령이 떨어질 것이다. 알고 있었지만 몸이 먼저 움직였다. 너무 좋아서. 너무 설레서. 물을 최대한 조금씩 나오게 하고 씻었다. 혹시 엄마 아빠가 일어나실까 봐 머리를 약풍으로 이불속에서 말렸다. '나도 이렇게 바뀔 수 있구나' 피식 웃으며 혼잣말을 했다.


빨간색 티코. 선배의 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하얀 세상에 빨간 차가 싱긋 윙크했다. 선배는 아무도 밟지 않은 눈을 내가 처음 밟게 해주고 싶었다고 했다. 흰 눈이 펑펑 내리는 깜깜한 새벽길을 달려 도서관에 도착했다. 도서관의 명당을 딱하니 잡아놨다. 가방을 내려놓고 나와 자판기 커피를 뽑아 들고 도서관 앞을 뽀드득뽀드득 걸었다. 선배는 내 왼손을 잡아 자신의 주머니에 넣고 앞을 보며 걸었고 나는 그런 선배의 옆모습을 보며 걸었다. 선배와 내가 스노우볼 안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동화 속에 갇힌 주인공 같기도 하고 영화 속 주인공이 된 것 같기도 했다. 일상으로 지나쳤을 하루가 이야기가 되었다. 아무렇지 않게 지나쳤을 순간이 영원이 되었다. 그날의 느낌 색깔 온도 냄새 모든 것이 생생하다. 하늘을 올려다봤을 때 별의 느낌까지. 모두 다.


사랑은 이렇게 추억을 엮어가며 더 단단해지고 깊어지는 것 같다. 새벽에 일어나 도서관 자리를 맡아 놓고 아무도 밟지 않은 길을 밟게 해주고 싶은 마음. 그리고 아빠의 눈을 피해 조용조용 준비하며도 즐거웠던 마음. 서로의 마음이 서로의 마음으로 옮겨져 와서 뿌리를 내린다. 그때의 나, 그때의 우리 그리고 사랑. 지금의 나, 지금의 우리의 그리고 사랑. 같은 사람이지만 이젠 그때와 다른 사람이 된 우리. 같은 사랑이지만 그 밀도가 달라진 우리의 사랑. 나는 그것을 우리라고 쓰고 사랑이라고 읽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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