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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작가 Nov 17. 2021

마흔앓이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 결혼했고 여전히 날 사랑하는 그와 두 아이를 낳아 살고 있다아이들은 건강하고 가끔 싸우기도 하지만 예의 바르고 착하게 잘 자라고 있다. 작은 학원을 운영하고 있고 지친 몸을 이끌고 돌아와 쉴 집도 있다노후를 위한 연금도 착실히 들고 있고 취미 생활도 하며 누가 봐도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하지만 어느 순간 공허함과 허무함이 손써볼 시간도 없이 밀고 들어왔다. 하루하루의 삶에서 의미를 찾을 수 없고 끝이 보이지 않는 심해로 감정이 자꾸만 가라앉는 기분이 들었다누군가에게 이런 고민을 털어놓으면 복에 겨웠다며 응석 부리는 어린아이의 투정쯤으로 간주해 버린다스스로 구명조끼를 펴고 수면 위로 떠올라야 하는데 자꾸만 자꾸만 가라앉는 것 같았다.

 

 

생의 절반을 보낸 나는

가야 할 길을 잃고

어두컴컴한 숲 속을 헤맸다.

거칠고 황량한 그 숲을

어찌 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생각만 해도 두려움이 되살아난다.

단테 <신곡>

 

 

언제부터 상처가 나면 잘 아물지 않는다감기만 걸려도 낫는 시간이 느려졌다몸은 더 자주 아프고 낫는 데는 더 오랜 시간이 걸리고 상처가 나면 또 잘 없어지지도 않는다. ‘아, 이게 마흔이구나.’ 대신 마음은 좀 다른 것 같다전보다 덜 상처를 받고 더 빨리 상처를 회복한다상처 받지 않는 방법빨리 치유하는 방법을 스스로 깨우쳤다고 해야 하나? 마흔은 마음에 상처가 나면 토닥여주기도 하고 밴드를 붙여주기도 하며 스스로를 치료하는 것에 많이 익숙해진 나이다

 

하지만 마음의 문제는 밴드만 붙인다고 되는 게 아니고 덮어놓아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사라지는 것 아니다그럭저럭 버티고 버텨내던 삶이 어는 순간 하고 터진다욱여넣은 몸 때문에 청바지 단추가 하고 터지듯참고 있던 감정이 하고 터져버리는 순간이 온다참고 있던 마음이 . 지치고 아팠던 마음이 하고 터져버릴 수 있는 나이 또한 마흔이다


참고 버티는 것에 익숙해져 버린 나이 마흔, 아파도 아픈지 모르고, 슬퍼도 슬픈지 모르고, 기쁜 일에도 기뻐할 줄 모르고, 시간을 보내며 노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며 살아온 시간들의 총합 마흔. 이제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는 것을 돌아볼 수 있고 그렇게 살면 안 된다는 것도 알게 된 나이. 아프면 아프다고, 슬프면 슬프다고 말하고 기쁨은 기쁨으로 행복은 행복으로 온전히 느낄 수 있는 나이. 몸도 마음도 전과는 태도를 바꾸는 나이. 달라진 몸과 마음, 달라진 삶에 대한 생각과 태도로 살아가기 위해 고치를 뚫고 나와야 한다. 다시 한번 삶을 살기 위한 준비를 하는 것이다. 

 

마흔앓이는 그 역시 견뎌내야 하는 인내심 테스트 같은 것이 아니다마음의 문제든 신체적 문제든 신경을 쓰고 관심을 기울여 더 아프고 지치지 않도록 돌보라는 신호 같은 것이다잠시 멈춰도 된다는 신호다하던 일을 멈추고 숨을 고르고 지치고 힘든 나를 챙기고 나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고치 안에서 잠시 쉬며 또다시 시작할 삶을 준비하는 것이다. 구명조끼를 펼 수 있는 용기를 갖게 되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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