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인

인생 책이라 함은...

by 이작가

책을 읽는다는 것은 나를 오롯이 나로만 만난다는 것이다. 책을 통해 나를 뒤돌아 보고, 책을 통해 지금 나의 위치를 가늠해 보고, 책을 통해 내 미래를 상상해 볼 수도 있다. 작가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책을 썼든 작가의 손을 벗어난 책은 독자의 몫이다.


<연인> 정호승



많은 책 중에서 내가 인생 책이라고 부를 수 있는 책은 정호승 작가의 <연인> 이다. 정호승 작가가 운주사를 방문했다가 우연히 두 개의 풍경중 하나의 풍경의 물고기가 없는 것을 보고 글을 썼다고 한다. 스치듯 지나칠 수 있는 것을 통해 글을 쓰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작가인것 같다고 그때 나는 처음 느꼈다. 그리고 작가의 삶을 살아보고 싶은 야무진 꿈을 꾸던 나에게 한 가지 목표가 생겼다.


무의식을 의식화 하자.


세상을 스치듯 지나치지 말고 모든 것들에게 의미를 부여해 보기로 결심한다. 버스 안에서 흘러가듯 지나가는 사람들의 대화 속에서 소재를 찾고, 별일 없이 스치는 자연 속에서 의미를 찾고, 일상의 평범함 속에서특별함을 찾고자 언제나 귀를 쫑긋 세우고 듣고 눈을 크게 뜨고 관찰했다. 그리고 그것들을 나의 감정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많은 시간을 보냈다.



캠퍼스 커플(CC) 탄생.

2000년 10월 9일 지금의 남편과 오늘부터 1일을 외친 날이다. 하루하루가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가볍고 설레고 신났다. 일어나기 싫던 아침이 빨리 오길 기다리고, 떨어지는 낙엽이 아름답고, 가을 햇살이 눈부시다 못해 눈물겨웠다. 정말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웠단 말인가? 내가 이렇게 너그러운 사람이었단 말인가? 나는 애교를 부릴 줄도 알고, 말도 안 되는 아재 개그에 배꼽을 잡으며 웃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지금까지 알지 못하는 나를 발견할 수 있는 하루하루가 이 배속으로 지나가는 것 같았다.


잔디밭에 앉아 정호승 작가의 <연인> 이야기를 남편에게 했다. 나중에 정호승 작가님처럼 되고 싶다고 한 것도 같다. 떨어진 풍경 물고기를 보고 글 한편을 써낼 수 있는 사람이 돼보고 싶다고 했다. 따뜻한 가을 햇살을 간질이는 바람처럼 가볍게 한 이야기였다.


방학을 한 주말 토요일.

우리는 운주사에 가기 위한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만났다. 학교가 아닌 다른 곳에서 만나서 그런지 설렘이 더 했다.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커피도 한 잔 마셨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남편은 커피를 마시면 심장이 심하게 뛰어서 잘 마시지 않았다. 커피를 좋아하는 사귄 지 얼마 안 된 여자 친구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였는지 커피를 잘 마시는 척했던 것이다. ( 역시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다. 지금은 커피를 즐길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덜컹거리는 버스에 앉아 두 손을 꼭 잡았다. 그때는 손만 잡아도 왜 이렇게 떨리는지 심장이 손바닥에 있는 것처럼 손바닥까지 콩닥거렸다.


시외버스에서 내려 다시 운주사로 가는 버스를 탔다. 잔돈이 없어 만 원짜리 지폐를 내자 버스기사님께서는 8000원을 동전으로 거슬러 주셨다. 8000원이 맞는지 확인해 보라는 버스기사 아저씨에게 맞다고 대충 이야기하고 자리에 앉았다. 키득키득 뭐가 그리 재미있었는지 우리는 쉴 새 없이 떠들어댔다. 눈이 와서 온통 하얀 세상에 우리 둘 뿐인 것 같았다. 버스에서 내려 한참을 걸어가야 운주사가 나온다. 겨울이고 눈까지 와서 방문객은 없었다. 상점도 거의 문을 닫아 따뜻한 차라도 마시고 싶었지만 몸을 녹일 수 있는 것은 꼭 잡은 두 손뿐이었다. 나잡아봐라 하고 놀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처음 사랑이 시작될 때는 왜 그러게 유치한 것들이 좋았는지 모른다. 사실은 지금도 그런거 완전 좋아한다. 남편이 이 글을 읽었으면 좋겠다.


정말 두 개의 풍경 중 하나의 풍경에는 물고기가 없었다. 아직도 세상 구경을 더 할게 남았나 보다. 솔직히 너무 추워서 풍경을 보면서 감탄을 하거나 깊은 명상에 빠지는 것은 불가능했다. 얼른 따뜻한 곳에 들어가 몸을 녹이고 싶은 맘이 컸던 건 사실이다.


운주사를 걷는 중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우리 과 전공 교수님이다. 남편의 전공 수업 점수가 모자라 오늘 재시험을 치지 못하면 F학점이라고 했다. 남편은 그날이 재시험 날인 것을 알면서도 나와의 첫 여행을 위해 내년 재수강을 선택한 것이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핀잔을 주긴 했지만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날 위해 F학점을 받은 이 남자를 내가 책임져야겠다. 언젠가 나도 이 남자를 위해 중요한 무언가를 포기할 수밖에 없는 일이 생긴다면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해야겠다.' 그래서 7년 뒤 나는 이 남자를 책임지기로 스스로에게 한 약속을 지켰다.


사랑이란 오래 갈수록 처음처럼 그렇게 짜릿짜릿한 게 아니야.
그냥 무덤덤해지면서 그윽해지는 거야.
아무리 좋은 향기도 사라지지 않고 계속 나면
그건 지독한 냄새야.
살짝 사라져야만 진정한 향기야.
사랑도 그와 같은 거야.
사랑도 오래되면 평생을 같이 하는 친구처럼
어떤 우정 같은 게 생기는 거야.
26p


글을 쓰는 자세에 대해 처음 생각해 볼 수 있게 해 준 책이고, 글쓰기 인생의 첫발을 내딛게 한 책이다. 그리고 남편과 결혼을 결심하게 해 준 책이기도 하다. 긴 시간을 연애하고 결혼을 해서 지금까지 20년이 넘는 시간을 함께 했다. 내 인생의 반이 넘는 시간을 한 사람과 함께하면서 <연인>의 이 구절을 자주 생각했다.


사랑이란 언제나 찌릿찌릿할 수 없다는 말을 처음엔 이해하지 못했다. 그 설렘과 떨림이 언제까지나 계속될 거라 믿었다. 우린 다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를 익숙해하고 삶의 배경처럼 여기기도 했다. 우리도 어쩔수 없다고 생각하며 힘들어하던 시기에 이 책을 다시 읽었다. 언제까지나 찌릿하기만 하면 감전돼 죽을 수도 있다. 이제는 끈끈한 무언가가 우리 사이를 연결하고 지탱하는 듯한 느낌이다.


상처 없는 사랑은 없다.
장미가 아름다운 것은 바로 그 상처 때문이다.
나는 많은 것을 잃었으나
모든 것을 잃지는 않았다.


상처 없이 깨끗하기만 한 사랑이 어디 있겠는가. 흠짐 나고 깨진 곳은 다듬고 다시 붙여 예쁜 그림도 그려주면 더 멋지고 단단해진 사랑이 된다. 지금을 서로에게 감사하며 즐겁게 사는 것이 과거에 발목 잡히지 않고 미래를 걱정하지 않고 사는 방법이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며 많은 것을 잃었지만 더 큰 것을 얻다.그리고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 안으며 더 큰 사랑으로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인생 책을 <연인>으로 선택한 이유는 내 삶의 이유를 찾게 해 준 책이기 때문이다. 형용할 수 없이 아름다운 책도, 깊은 생각에 빠져 하루 종일을 생각하게 하는 책도, 세상의 귀한 지혜를 다 담아 놓은 책도 너무 좋지만 나에게 최고의 책은 망설이지 않고 <연인>이다. 세상의 모든 것들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게 해 주었고 남편과의 사랑을 지켜나갈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로 인해 내 소중한 보물 1,2 호를 만났다. 내 인생 최고의 책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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