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붙일 곳 없는 아이들의 불안과 외로움을 달래준 투박한 호의
내게는 그러한 믿음을 심어준 영웅들이 있다. 아마 그들은 나를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내가 기억하는 다정한 어른들은 나의 어린 시절을 구해주었다. 다정함은 본인도 모르는 새, 누군가에게 스며들어 세상을 따뜻하게 해 줄지도 모른다.
내 기억은 아주 어릴 때 멈추어, 더 이상 쌓이지 않았다. 보통 기억은 연속되어 쌓인다던데, 기반이 없으니 도무지 이어지질 않는 듯했다. 예를 들어, 3살 때의 기억이 수납되어 있으면, 4살이 되어서는 4살에 형성된 다른 기억과 3살의 기억이 함께 차곡차곡 빨래처럼 개어 정리되어 다시 수납되고, 5살 때에는 그 두 기억을 다시 정리하면서, 다시 몇 개의 서랍에 합치거나 분리하는 형식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합쳐지지 못한(즉, 쓸모없는) 기억들은 가차 없이 소거된다. 언니의 얘기를 들어보면 그랬다.
나는 애초에 어떤 기억이 제대로 수납되지 못했는지 거의 없거나, 뒤죽박죽이었다. 엄마와 아빠가 이혼한 사실은 인지조차도 어려웠다. '이혼'이라는 관계의 형태를 인식하는 과정 자체가 매우 오래 걸렸다. 왜냐하면, 내게는 이미 해체된 상태의 가정과 계속해서 바뀌는 환경이 기본값이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보호자는 아빠일 때도, 엄마일 때도, 이모라고 부르는 엄마의 친구들일 때도, 친척 어른들일 때도, 조부모님일 때도, 진주의 할머니일 때도 있었다. 아빠와 엄마를 제외하면 할머니, 할아버지와 사는 기간도 꽤 길었던 것 같다.
가끔은 불현듯 생각나는 사람들이 있다. 흐릿한 기억 속에서도 같이 지내거나 살았던 어른들보다도 선명히 그려지는 것이다. 그분들은 우리와 연결점 하나 없는 완벽한 타인이다. 그런데도 생각이 나는 이유는 따로 있다. 조부모님과 살던 초등학생 때, 나는 집이 몹시 불편했다. 서예를 좋아하시던 할아버지는 집 전체에 서예 작품을 말려두셨고, 혹여 조금이라도 밟으면 굉장히 무서운 얼굴로 노려보셨다. 딱히 큰 소리를 내시거나 혼을 내진 않으셨지만 그 싸늘한 눈초리를 받고 싶지 않아서, 나는 얇디얇은 한지를 밟지 않기 위해 좁은 틈으로 살금살금 까치발을 들고 걸어 다녔다. 할머니는 생활 습관에 엄격하셨고, 여러 활동을 하셔서 항상 바쁘셨다. 집에는 은근한 규칙이 많아 지키지 않으면 역시나 눈치가 많이 보였다.
크게 불편한 부분은 없었지만, 매일 친구집에서 자는 듯 마음이 불편했다. 아닌 척했지만, 다른 어른들과 살 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차라리 아빠가 바빠서 자주 집을 비우더라도, 그냥 언니랑 둘이 지내는 게 마음은 훨씬 편했다. 이러나저러나 나는 밖에 나가 놀 때가 가장 즐거웠다. 학교에 일찍 가고, 집에는 가능한 늦게 들어갔다. 그래도 친구들이 다 집에 들어갈 때면, 어떻게든 들어가고 싶지 않아서 놀이터에서 꾸역꾸역 혼자 그네를 타기도 했다. 이도저도 안 될 때면 가는 곳이 있었다. 바로 조부모님이 사시는 아파트 바로 앞의 골목이었다.
그 거리엔 내가 좋아하는 가게가 참 많았다. E 문구점, H 분식점, G 책방, L 마트, P 김밥집, D 펌프장... 그 외에도 아주 많은 가게가 있지만, 가장 생각나는 한 아저씨만 적어보려고 한다. 왼쪽에는 내가 다니는 초등학교, 오른쪽에는 언니의 중학교여서, 나와 언니는 집에 들어가지 않기 위해 그 골목에서 만나 자주 시간을 보내곤 했다. 땅거미가 기운 없이 축 늘어져도, 끝까지 남는 사람은 결국 우리 두 자매뿐이었다.
파란색 큰 간판을 단 E 문구점의 사장님은 아마도 지금의 내 또래 거나, 더 젊지 않았을까 싶다. 잘은 기억나지 않지만, 키가 크고, 마르고, 안경을 낀 앳된 얼굴이었다. 많아봐야 30대 초반이었을까? 선생님 같은 느낌이어서, 나와 언니가 초등학생 때부터 잘 따랐던 것 같다. 그곳은 나름 세련되게 꾸며진 팬시점이었다. 규모는 문방구 정도로 작았지만, 꾸며진 느낌이 동네 문방구보다는 지금까지도 운영되고 있는 문구 프랜차이즈 ‘M’사나 ‘A’ 사의 느낌에 가까웠다. 작은 문방구에서는 보기 어려운 펜 종류 등 웬만한 문구류는 거의 취급하고, 미술 도구나 PC 제품, CD도 판매했다. 당시 동네에 CD를 파는 곳이 많지는 않아서, 게임을 좋아하는 언니는 그곳에 거의 상주하다시피 했다. 아저씨는 게임을 좋아하는 언니의 취향을 파악하고는 새로운 게임이 나오면 CD를 추천해 줬고, 언니는 아저씨가 추천해 준 게임은 대부분 재밌게 끝을 보는 편이었기 때문에 믿고 사는 경향이 있었다.
언제나 큰 통창 밖을 내다보고 있던 그가 우리의 사정을 몰랐을 리 없다. 꽤 수다스러웠던 그 아저씨는 우리가 오면 자리를 내어줬다. 새로 들어온 물건들을 하나하나 설명해 주기도 하고, 카운터 근처에 의자 두 개와 간식거리를 내어주고는 이런저런 얘기를 함께 나누곤 했다. 사실 애들이랑 하는 얘기는 별 시답잖은 것들이라 학교에서 있었던 일, PC 게임 얘기 같은 것들이었다. 언니랑 아저씨는 생각보다 게임 얘길 많이 하기도 했다. 언니가 추천해 준 게임을 재밌게 하면 생각보다 뿌듯해하기도 했다. 동네의 문구점의 폐점시간은 생각보다 이르다. 그때도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아저씨는 우리가 먼저 일어나기 전까지는 ‘문을 닫아야 하니 그만 가보라’는 말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매번 언니가 내 손을 잡고 먼저 일어나곤 했다.
“어, 너무 늦었네요. 죄송해요. 가볼게요.”
“아저씨, 안녕히 계세요!”
“그래~ 들어가~”
“CD 감사합니다.”
“과자 감사합니다!”
“남은 과자 가져갈래? 게임은 해보고 재밌는지 또 알려줘~”
“네. 하루면 돼요. 내일 또 올게요.”
“하루? 아이고, 밤은 새지 말구~”
“그래, 언니! 밤은 새지 말구~”
“하하! 동생 말 들어. 여기 과자 챙겨가구.”
“알겠어요, 천천히 해볼게요.”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우리가 같이 먹다 남은 과자는, 포장까지 공짜였다. 가끔 언니에게는 유행이 지난 게임 CD를 그냥 주곤 했다. (“이건 진짜 재미없더라.”라는 말도 덧붙이긴 했지만)
당시에 게임을 하다가 종종 밤도 새우고, 밥도 챙겨 먹지 않는 언니를 걱정해 주는 사람은 3살 어린 동생인 나와 동네 문구점 사장님 뿐이었다는 사실이 우습긴 해도, 보이기엔 그랬다. 언니는 그 걱정이 싫지 않은 듯, 게임 CD도, 키보드와 마우스도 꼭 거기에서만 샀다. 초등학생 때부터 책을 사러 광화문역도 혼자 가고, MP3를 사러 용산역도 혼자 가던 언니지만 굳이 컴퓨터용품이나 주변기기를 살 땐 E 문구점을 찾아갔다. 집에서 사용하는 성질머리를 보고 있으면, 구매한 제품들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아 보였지만, 꼭 거기서만 샀다.
하지만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친구가 많다는 걸 과시라도 하듯이 친구들과 우르르 E 문구점을 찾곤 했다. 집 앞이긴 했지만 사실 초등학교에서는 꽤 먼 거리여서, 친구들을 굳이 모두 데리고 가는 일은 쉽지 않았다. 가는 길에 문구점이 10개는 넘게 있었을 거다. 그래도 굳이 그랬다. 친구들이 뭘 사야 한다고 하면 E 문구점으로 데리고 가고, 사소한 거 하나라도 거기서 사려고 무진 애를 썼다. 나나 언니나 그 골목에 대한 로열티가 굉장히 높았던 걸로 기억한다. 심지어 나는 아직도 그 골목길만 들어서면 코끝이 찡하다 못해 눈물이 줄줄 흐르곤 한다.
사실 E 아저씨가 천상 친절한 사람이었는지, 아니면 그냥 우릴 잠시 가여워했던 건지는 모르겠다. 때때로 늦은 시간까지 정처 없이 분식집과 펌프장, 책방, 자신의 문구점까지 어슬렁 거리는 모습이 뻔히 보였을 터라 그저 동정을 베풀었던 순간에 불과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내게는 하나의 계기였다. 그 골목은 부모님이나 집안의 어른이 마치 신과 같이 절대적이던 어린 시절, 그 자리가 비어있더라도 버텨낼 수 있고, 타인의 온정으로도 기운을 낼 수 있다는 신뢰를 만들어준 장소였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종종 외롭고 허무한 기분이 들 때면 그때 그 골목과 완벽한 타인들이 내어준 다정한 순간들을 떠올린다.
그렇다. 어린 시절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내가 지금까지도 기억 속에 간직하고 있는 소수의 ‘진짜 어른’들은, 나의 세상을 구한 다정한 영웅들이었다.
나도 언젠간,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되어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