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목민 삶에서 가장 오래 함께 했던 나의 언니, 장녀 관찰 보고서
나는 14살, 언니는 17살이었다.
떠돌이 아가였던 나와 달리, 갓 태어난 언니의 세상은 따뜻한 엄마의 손길과 든든한 아빠의 품으로 가득했다. 어렸을 적 사진만 보아도, 선머슴 같던 나와는 달리 언니는 얼마나 엄마의 손을 많이 탔는지 한눈에 보인다. 구불구불 긴 파마머리에 예쁜 드레스를 입고, 왕관 머리띠나 반짝이는 귀찌를 달고 있어 어린 내 눈에는 공주님 같아 보였다.
물론 부모님이 다툴 때면 언니는 공주님이 아니라 기사님이 되어야 했다. 작은 몸으로 더 작은 나를 안고서, 침대 옆 구석에서 웅크리고 한참을 앉아있었다. 엄마는 방문을 열 때마다, 한껏 웅크린 언니의 등과 거기 안겨 잠든 내 모습이 슬프고 미안했다고 한다. 결국 어른들의 이해관계 속에서 언니와 나는 엄마와 이별하게 되었고, 부모님은 우리에게 충분한 설명을 해주지 못했다. 우리는 그때부터 유목민처럼 거처를 옮겨 다니기 시작했다. 언니는 이리저리 전학을 다니게 되면서,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어서야 간신히 친구를 사귈 수 있었다.
그러면서 언니가 좋아하던 머리카락은 싹둑 잘렸고, 풍성하고 하늘하늘한 옷들은 어른들로 하여금 하나씩 버려졌다. 손이 많이 가는 모든 것들이 제한되었다. 언니는 자주 울고 떼를 쓰며 천덕꾸러기가 되었다. 그건 나도, 언니도 알았다. 왜냐하면 어른들이 그렇게 얘기했기 때문이다.
'어릴 땐 그렇게 귀엽고 예뻤는데...'
'쟤는 왜 저렇게 못됐을까?'
언니는 생생한 기억을 안고서 속절없이 엄마를 그리워했다. 그때의 나는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언니가 소리 내어 울면, 그 옆에서 소리 내지 않고 울면서 언니에게 기대어 있었다. 그 시절 언니의 사진을 보면 지나치게 슬픈 얼굴이라 당황스럽기까지 하다. 나도 덩달아 미어지는 얼굴을 지을 때가 있는데, 둘이 함께 그런 우울한 표정을 하고 있는 사진들을 보면, 그걸 찍어준 사람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궁금하기도 하다. 지금의 나는 어린아이가, 그만큼 깊은 슬픔을 알아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다행히 부모님은 언니가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부터 친구처럼 연락을 하며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 그 덕에 우리는 방학 때마다 서울과 진주를 비행기로 오갔다. 1년에 3번. 여름, 겨울, 봄. 엄마와 행복한 추억을 많이 쌓았다. 당연히 1년에 3번, 이별도 맞이해야 했다. 엄마와 떨어질 때마다 찢어지는 마음은 아물지도 않았다. 30일의 방학이 끝나면, 서울로 돌아왔고, 서울로 돌아온 저녁에는 언니와 손을 맞잡고 숨죽여 울었다. 눈물이 두세 줄기씩, 폭포처럼 쏟아졌다. 나는 항상 언니보다 먼저 지쳐 잠들었는데, 아마 언니는 그렇게 울면서도 아침까지 잠들지 못했다.
어렸던 내가 미처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언니에겐 그 시간들이 많이 고되었나 보다. 어느 날, 언니가 아빠에게 많이 혼났다는 해 질 녘 밤이었다. 내가 친구들과 집 앞 놀이터에서 ‘경찰과 도둑'이라는 놀이를 하고, 기억도 안나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집에 돌아갔던 날이다.
“언니?”
언니가 없나. 아빠한테 혼났댔는데. 어디 나갔나?
집은 언제나처럼 조용했다. 나는 언니 방의 문을 벌컥 열었다. 언니가 방 한편에 이상한 자세로 기대어 누워있었다. 누워있는 자리는 온통 붉어 나는 금세 어지러웠다. 나도, 언니도 놀랐고, 언니가 무의식적으로 오른손을 뗐다. 왼 손목에서 피가 터졌다. 나는 사람 몸에서 피가 그렇게 높이도 솟구칠 수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언니의 마음을 미처 읽어주지 못했던 것이 못내 슬펐다. 주저앉아 언니의 손목을 수건으로 꽉 부여잡고 울기만 했다. 나는 119가 아닌, 아빠와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언니도 병원은 진저리를 쳤다.) 나는 나름대로 언니를 보호하며, 이어질 풍경을 그려보았다. 두 분이 아픈 언니와 슬픈 나를 어릴 때처럼 감싸 안아주고, 우리 가족이 극적으로 화해하는 행복한 상상이었다.
아주 잠깐.
철없던 내가 부린 찰나의 욕심이었다. 곧 마주친 아빠와 언니는 서로를 향해 더없이 격렬한 분노를 쏟아냈고, 망연자실한 엄마는 나를 꼭 껴안고 있었다. 언니의 눈이 새빨갰다. 온 피부가 창백한데도, 두 눈엔 핏발이 잔뜩 서 있었다. 손목이 아프지도 않은지, 분개한 아빠를 뒤로하고 큰 가방에 옷을 마구 욱여넣었다.
날뛰는 아빠는 상처 입은 곰 같았다. 어딘가 못 견디게 아파서, 몸부림을 치는 듯이 보였다. 예전에 아빠가 보던 동물의 왕국에서, 심하게 공격받은 맹수가 딱 그랬다. 살이 갈라진 건 언니인데, 아빠는 마치 제 상처에 누가 소금이라도 뿌린 듯이 펄쩍펄쩍 튀어 오르고 있었다.
나와 언니와 엄마는 아빠를 뒤로 하고, 집을 나섰다.
집을 나온 우리 셋은 나란히 손을 잡고 걸었다.
아무 말도 잇지 못한 채, 조용히.
발맞춰 엄마의 고향으로 향했다.
아!
언니는 죽을 뻔했던 게 아니라, 엄마를 다시 찾으려던 거구나.
나는 가끔 궁금하다.
누군가의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던 다정함이 썰물처럼 빠져나갈 때마다,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은 무엇이 될 수 있을까.
확실한 건, 가만히 둔다 해서 다시 '좋은 것'으로만 채워지진 않는다는 사실이다.
어리면 어릴수록 더욱 그렇다.
부모님이 이혼하셨을 때, 나는 너무 어려서 헤어짐이 어떤 의미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게다가 모두가 같이 살았던 시간보다는 그렇지 못했던 시간이 더 길기 때문에, 엄마와 아빠 사이를 오가는 것이 어찌 보면 아기 때부터 당연한 삶이었다.
언니에겐 그렇지 않았나 보다. 단 몇 년의 차이지만, 애정과 관심, 손길, 유대로 가득했던 언니의 삶에서 그 모든 것들이 사라지고 고성과 다툼, 이별, 적대로 채워졌을 때 언니는 많은 것들을 포기했었다. 내 평생의 더없이 멋진 아버지인 그는, 언니에겐 어린 시절 내내 불같이 타오르는 천적이었다. 아빠는 언니의 끝없는 질문과 정제되지 않은 감수성, 관심에서 비롯된 호기심을 곤혹스러워했고, 자신의 권위에 대한 도전 내지 혐오라고 오해했다. 언니는 언니가 이해하지 못할 이유로 자주 혼났다. 단순히 혼났다고 하기엔 부족할 정도로 심할 때도 있었다.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감정의 벽을 쌓아나갔다. 나는 사춘기가 없었다. 적어도 가족들에겐 그래 보였을 거라고 생각한다. 나와 달리 언니는 10대가 되자, 말 그대로 허리케인을 몰고 다녔다. 조용할 땐, 그저 태풍의 눈 속에 있는 것 같았다. 매일 불안해 보였다.
나는 보았다.
가득했던 다정함의 빈자리를 적절하게 채워놓지 않으면, 아주 위태로운 격정이 차지할 수 있다. 모든 걸 파괴하는 태풍이 올 수도, 침묵만이 남아있는 긴 겨울이 남을 수도, 따뜻해 보이나 허상일 뿐인 아지랑이만 피어오를 수도…
오늘 얘기한 사라진 사랑의 빈자리는 우리 가족의 글을 쓰기 시작한 이유 중 하나이다. 나나 언니처럼 웃는 척해야 했던 아이나 웃기 힘들었던 아이가 누군가와 진심을 다해 마음을 나누고, 깊이 사랑에 빠질 수 있게 되기까지 얼마나 고되고 오랜 시간을 거쳐야 했는지는 말로 다 표현하기가 어렵다.
그럼에도 다시 채울 수 있다, 다정함으로.
어떠한 형태로든 온 땅을 메우며 밀려온다.
기다림이 지난하더라도 밀물의 시간은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