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곳에서 만난 고독과 열등감, 그리고 사랑스러운 새 친구
방학 때만 놀러 가 마냥 뛰어놀기만 할 땐 몰랐는데, 알고 보니 그곳은 교육열이 굉장히 높은 도시였다. 게다가 내가 가야 할 학교는 오랜 역사를 가진 명문 사립 중학교였다. 새로운 학교에서 나는 3개월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생소한 감정들을 많이 배울 수 있었다. 그곳은 나를 고독, 열등감, 억울함 같이 내가 당시에는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던 마음으로 나를 자꾸만 밀어 넣었다. 물론 성적도 많이 올랐지만, 그건 결코 학교의 경쟁적인 분위기나 그로 인한 불안감 때문이 아니었다.
그곳은 온 동네가 내 세상이고, 모두가 내 친구던 서울에서의 생활과는 전혀 다른 곳이었다. 공부와는 담쌓고 매일 뛰놀기 바빴던 천방지축 서울 여자애는 그곳 아이들에게 많이 낯설었나 보다. 0점으로 반 평균을 깎으면 박수를 받는 게 아니라 따귀를 맞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물론 실제로 그렇진 않았겠지만, 그만큼 마음이 불편했다.) 책상에 얹은 팔이 괜히 따끔거리고, 엉덩이가 저렸다. 매일 수많은 친구들에 둘러싸여 있던 내가, 완벽하게 혼자라는 사실이 나를 꽤나 당황하게 만들었다. 이럴 수가!
나의 가정환경이 어떻든, 보호자가 누구든, 내게 '친구'는 언제나 함께하는 존재였다. 없어도 금세 만들 수 있었고, 자신이 있었다. 하다못해 심심할 땐 친구처럼 나뒹굴며 놀 수 있는 친언니라도 있었는데, 당시 언니는 언니의 사정이 있었기 때문에 한동안은 말도 섞기 힘들었다.
새 학교의 지나치게 많고, 또 엄격한 규칙은 나를 옥죄었다. 그런데도 그 학교에서 나름 논다는 애들이 자꾸만 나를 불러내 시비를 걸곤 했는데, 그 애들은 서울의 학교에서 평범한 애들보다도 하얗고, 힘도 약했다. 정말 약했다. 세네 명이서 나를 밀쳐대도 본인들 손가락이 아플 것 같았다. 정말 공부를 많이 해야 하나보다, 안쓰럽기만 했다.
따분하고, 얄미웠다. 자기들은 친구도 있으면서, 왜 굳이 나를 괴롭히려고 하지? 지방 애들은 사투리 쓰면서 욕도 무섭게 한다는데, 걔네는 욕도 서투르게 해서 좀 귀여웠다. 그래서 오히려 짜증이 났다. 점차 상황도, 사람도, 또 무기력해지려는 나 자신까지 못내 미워지기 시작했다.
그쯤, 놀랍게도 반에서 제일 공부를 잘하는 반장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니 웃긴다. 저것들 안 귀찮나?"
"귀찮으면 어쩔 건데?"
"쟤네 벨꺼 아이다. 공부도 쫌 하는 아들인데, 갑자기 와 저러나 모르겠다. 서울 아 왔다고~ 신기해가 깝죽거리나 본데~ 무시해라~"
"알아, 그러고 있어!"
"올~ 내가 쪼메 바빴는데, 진작 말 좀 붙이볼걸. 재밌네!"
"뭐가 재밌는데?"
"뭐가 재밌는데~? 서울말!"
"난 너 말투가 재밌는데?"
"그라믄 니도 따라 해봐라!"
"그라믄 니도 따라 해봐라~!"
신기하게도 첫 친구가 생기자마자, 내게 피어오르던 못된 마음들이 갑자기 묘하게 변화하기 시작했다. 나를 조금씩 짓누르던 감정들이 엄청난 에너지가 되어 나를 고조시켰다. 나는 그 아이와 서로의 문화를 소개해주고, 많은 장소를 놀러 다녔다. 서울을 오가기도 했고, 나중에는 서울 친구들이 내려와 서로의 친구들을 소개해주기도 하면서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다.
그러면서 기말고사가 훌쩍 다가왔다. 내게 처음으로, 유일하게 다가와준 그 친구는 반 1등인 우등생이었고, 처음부터 내가 공부를 정말 못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같이 시간을 보냈지만, 나와 그 아이의 성적은 하늘과 땅 차이일 건 자명했다. 그때부터였다. 그 아인 내 성적이 어떻게 나올지 별로 궁금해하지도 않았는데, 혼자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이 아이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들고, 또 내가 못하는 ‘공부'로 뭔가 보여주고 싶다는 말도 안 되는 욕망도 생겼다.
그 아이의 다정함은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한 나의 고독과, 열등감과, 억울함을 몹시 강렬한 에너지로 전환시켜 주었다. 나는 책상에 오래 앉아있기 시작했다. 그때 내가 딱히 비상한 두뇌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는 걸 깨달았다. 같은 걸 오래도록 보아야 했고, 또 반복해서 외워야만 했다. 하지만 그러면서 집중력이 높아지고, 인내심도 생겼다. 주변을 조금씩 미워하려던 마음이 부끄러워지기도 했다.
“나는 여기서 이렇게 공부를 열심히 하게 될 줄 몰랐어.”
“와? 시골이라서?”
“아니, 그런 건 아닌데. 그냥 나한테는 방학 때마다 놀러 오는 곳이었고… 서울에서도 워낙 공부를 안 했으니까.”
“근데 만다꼬 그래 열심히 하노?”
“그냥…”
너랑 공부하는 게 좋아서.
못내 부끄러웠던 열네 살의 나는 뒷말을 삼켰지만, 사실 그 학교는 정말이지, 그렇게 말랑한 마음으로 버틸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사실 나의 성향으로 오래 있기는 어려웠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토록 살벌한 경쟁 속에서도 내게 한없이 상냥했던 친구에게 나는 무한히 이로운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낯선 환경에 뚝 떨어진 나를 다정하게 챙겨준 아이에게 유일하게 해 줄 수 있는 선물이 바로 좋은 성적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서툴러서 그랬는지, 그 학교의 시스템 때문이었는지, 그 친구의 최대 관심사가 공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꼴통 취급을 받고 있는 내가 좋은 성적을 보여준다면, 이 아이가 내게 잘 대해 준 것이 결과적으로는 서로에게 좋은 영향과 평판이 되어줄 것이라고 상황에 빠르게 적응하게 된 것이다.
시험지를 돌려받는 날이 되었다.
나는 0점을 받았던 수학 시험에서 98점을 받았다.
다른 성적도 좋은 편이었지만, 친구와 공부한 과목은 월등히 높은 점수를 받았다. 물론 1등인 친구보단 모두 낮았지만. 딱 1개 문제를 틀렸는데, 친구는 그 문제까지 모두 맞혔다.
"역시! 100점은 네 거니까!"
나는 마냥 기쁘기만 했다. 친구도 나의 높은 점수를 본인 일처럼 기뻐해 주었다. 아쉽게도 나는 내게 있어 가장 완벽했던 시험 점수를 뒤로 하고, 서울로 다시 돌아갔다. 서른이 넘은 지금까지도 그 친구와는 잘 지내고 있다.
내가 처음으로 겪었던 외로움과 열등감은 감사하게도 나를 발전시켜 준 강력한 힘이 되어주었다.
이러한 신비로운 경험은 오롯이, 타인의 마음이 포근하게 스며들었던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낯선 곳에서 사랑스러운 친구를 만날 수 있었던 나의 행운에, 그리고 나를 그대로 보아준 친구에게 여전히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