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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E Jul 22. 2024

나는 그래서 회사를 차렸다

수 천 개의 악플이 내 날개의 깃털이 될 수 있었던 까닭은

나는 대학교 졸업 후, 곧바로 창업을 했다.


대학 생활을 하며, 여러 회사에서 인턴 및 대외활동을 해보기도 했고, 졸업 시즌에 잠깐 취업을 해본 결과 직장 생활이 나와는 맞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싶었지만, 내가 갔던 첫 회사에선 딱 하라는 만큼만 하지 않으면 꼭 누군가의 눈밖에 나고, 구설수에 올랐다. 자고로 큰 회사에선, 무엇이든 적당히 해야만 계단 위로 올라갈 수 있는 법이다. 좋게 말하면 안정적인 구조였지만, 나는 매일 달리고 싶어서 다리가 저려왔다.


그렇게 나는 회사를 뛰쳐나와, 내 회사를 차렸다.

콘텐츠 제작 및 광고 대행사인데, 처음엔 영상만 만들었다.


콘텐츠 제작 및 광고 대행업. 디테일한 창업 아이템과 회사 이름은 언니가 제공해 주었고, 함께 빌드업을 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쭉 같은 공부를 해온 터라, 일에 관한 한 이야기가 잘 통했다. 나의 모든 상황이 창업을 가리켰지만, 사실 오래전부터 정해진 일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나는 학생 때 TV 프로그램에 출연한 적이 있다. 그리고 조금은 양념된 각본에 맛깔나게 편집된 영상과 자극적으로 부풀린 기사들까지 더해져 엄청난 관심 세례를 받게 되었다. 수 천 개의 악플은 기본이고, 학교로 오토바이를 탄 남자애들이 하교 시간에 맞춰 찾아와 시비를 걸기도 했다. 다니는 독서실은 어떻게 알았는지, 독서실로 모르는 사람들이 찾아오기도 해서 엄마와 언니가 날 데리러 오기도 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나를 휴대폰으로 마구 찍어댔고, 들리게 욕을 하는 경우도 잦았다.


왜?

‘예쁜 척한다.’고...


사실 예쁜 척도 억울했지만, 그렇다 쳐도 악담의 수위가 말도 못 하게 과했다.

(성적인 욕도 많았고, 대놓고 하는 쌍욕이나 맹비난, 인신공격도 수두룩했다.)

당시에는 악플도 범죄라는 인식조차 없었기 때문에, 거리낌 없이 막말을 하는 사람들이 지금보다 많았던 것 같다. 상대보다 그러한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자기 자신에게 수치를 주는 수준이었다.


나는 꽤 오랜 기간 검색어 1위를 했고, 온갖 추측성 기사도 쏟아졌다. 기사 내용에는 완전히 틀린 내용도 많았지만, 아무리 항의 메일을 보내도 정정되진 않았다. 당시 내가 운영하던 홈피의 사진들이 기사의 자료로 활용되고, 아무렇게나 썼던 일기나 게시글의 내용들이 그들의 콘텐츠가 되었다. 나는 그런 시시콜콜한 얘기가 기삿거리가 된다는 사실이 놀랍고도 소름 끼쳤다.


그 충격에 내 머리통에는 커다란 원형 탈모가 3군데가 생겼다. 뻥 뚫린 살색 구멍에 맞았던 발모 촉진 주사는 다시 떠올려봐도 정말 정말 많이 아팠지만, 그때 받은 정신적인 고통에 비하면 모기에 물린 정도가 아니었을까 싶다.


다행히 친구들과 나의 사이는 훨씬 돈독해졌다. 원래도 친했던 친구들은 나를 빙 둘러싸고 기사님들처럼 지켜주었다. 여자애들이고 남자애들이고 온몸으로 모르는 사람들 앞에 나서 나를 비호해 주었고, 선생님들도 나서서 항의를 해주시곤 했다. 정말 고마운 경험이었다.


같은 프로그램의 제작진 분들도 내게 많이 미안해하셔서, (프로그램에 화제가 되어서 고마워하시기도...) 해명할 수 있도록 특집 방송을 만들어 주시겠다고 했지만, 단호하게 거절했다. 어딜 가도 아무나 나를 향해 카메라를 들이대는 행위가 무서워서, 촬영 자체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 참다못한 언니가 인터넷에 글을 써주었다. 그리고 우습게도 인증 하나 없는 그 글이 여론을 뒤집어 주었다. 고작 글 하나였다. 해명과 나에 대한 애정이 담긴 글이었다. 언니의 글은 여기저기 퍼져나갔고, 이후 급속도로 나에 대한 이유 모를 분노가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팍! 식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다양한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가 활성화되었을 때도 아니었기 때문에, 방송의 힘을 미처 몰랐던 10대 일반인에게 몹시 가혹했던 사건이었다. 언니는 몇몇 지나친 악플이 이어지자, 고소를 하자고 성화였지만 당시에는 온라인 범죄 대응 프로세스가 지금만큼 잘 되어있지도 않았고, 스트레스가 과했던 나는 모든 게 그냥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는 마음밖에 없었다.


이렇게 나는 영상과 콘텐츠, 그리고 (추후 SNS가 주축이 되는) 뉴미디어에 대한 강력한 힘을 몸소 체험했다.


당시에 달렸던 무분별한 악플들은 지금까지도 찾아볼 수 있다. 정말이지, 상스럽기 그지없다.

악플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범죄이고, 의미 없는 오물덩어리다. 그러나 내게 달렸던 악플들이 도리어 나를 성장시켜 줄 수 있었던 이유는, 영문도 모르게 내던져진 쓰레기의 밭에서 나를 구해주려 애쓴 내 친구들의 상냥함과 가족들의 무한한 사랑, 얼굴도 모르는 선한 타인들의 호의 덕분이다.


나는 어마어마한 악의 속에서도, 그들이 내게 나눠준 다정함으로 이겨낼 수 있었다. 나중에 가서는, 도대체 어떻게 살고 있길래, 얼마나 마음이 망가졌으면 화면 속의 모르는 여자애를 잡아 죽일 듯 악담을 퍼붓고 있을까... 궁금하고 놀랍기까지 했다.


하지만 내가 나눠 받은 다정함이 없었다면, 나 또한 이유 없이 받은 적의를 가득 안고서, 원형탈모나 계속 얻고 있었어야 할지 모른다. 시간이 더 흐르고 나니, '고것들을 싹 다 고소해서, 정신머리를 금융치료 해줬어야 했는데...' 하는 아쉬운 점이 남기도 했다. (공소시효가 더 길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때 나는 어떻게든 이 바닥에서 발붙이고 살 운명이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내 일은 내가 컨트롤할 수 있어야 했다. 이점은 내게 있어 가장 중요했다.

타인으로 인해 편집된 나는 내가 아니었다. 회사는 아주 기본적인 업무조차도 타의에 휘둘려야만 하는 곳이었고, 나는 어릴 때의 경험으로 그러한 환경이 편치만은 않았다. 사실 누군들 편하겠냐만은, 심지어 나는 언제나 용의 꼬리보단 뱀의 머리가 되고 싶은 사람이었다. 두 종류의 '나'를 고려해 본다면, 확실한 결론이 나온다.


나름의 '주제 파악'이다. 이러한 점을 인지하고 있었던 나는 대학 생활 때도 블로그 마켓을 통해, 내 사업체를 운영해 보았고, 인턴 생활 때도 나만의 팀을 꾸릴 수 있는 파트에 지원을 했었다. 내 삶과 콘텐츠 제작은 궁합이 좋았다. 높낮이가 다채로운 풍랑으로 가득한 인생은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영업을 할 때도, 여러 단계를 거쳐야 하는 영상 제작 프로세스에도 도움이 되었다.


나는 그래서 내 회사를 차렸다.


20대의 패기로 차렸던 회사는 어느새 30대가 된 지금까지도 순항 중이다. 물론, 순항 중이라 해서 폭풍우를 피할 순 없다. 갖가지 분쟁과 사건사고가 끊이질 않지만 보기보다 잘 해내고 있다.


어차피 힘든 일은 태어날 때부터 있었고, 태어날 때부터 있던 모든 힘든 일은 결국 내 자산이 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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