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허 딴 지 10년 만에 첫 차가 생겼다
지금까지 살아오며 잘한 일 중 하나는 대학교 1학년 때 운전면허를 딴 후 운전을 계속 해온 것이다. 나의 따끈따끈한 운전면허증이 장롱에 처박힐 것을 우려한 엄마는 본인 차의 운전대를 틈틈이 내줬고, 덕분에 나는 실전 운전 감각을 익혀 ‘무늬만 드라이버’가 아닌 ‘진짜 드라이버’가 될 수 있었다. 이후 10년간 자차는 없었지만 엄마차나 쏘카를 빌려 타고 이곳저곳을 다니며 즐거운 추억을 쌓았다.
나의 운전 라이프에 위기가 찾아온 건 서른 살에 육종암 진단을 받고 나서다. 대학병원에서 8시간이 넘는 종양 제거 수술을 받은 후 한동안 다리 통증이 심해서 액셀을 밟으며 도로 위를 달리는 내 모습을 더는 상상할 수 없었다. 완전치 않은 몸 상태가 지속되다 보니 이제 내가 좋아하는 드라이브 여행은 못하게 되는 건가 좌절감이 밀려왔다. 운전대를 잡지 못하면 생활 반경이 좁아져서 작은 세상에 갇히게 될 텐데. 앞이 캄캄하고 가슴이 턱 막혔다.
시간이 약인 걸까. 항암제를 바꾼 뒤 몇 개월이 지나면서 다리에 있던 통증은 서서히 가라앉았다. 다행히 운전을 다시 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엄마차 운전석에 앉아 차창 밖으로 불어오는 바람을 쐬며 묶인 손발이 풀린 듯한 해방감을 느꼈다. 간만에 맛본 자유의 달콤함은 기어코 내 안에 단단한 결심을 만들어냈다.
‘언제든 자유롭게 떠날 수 있게 내 차를 장만하자!’
자차를 구입하면 엄마의 스케줄이나 쏘카의 이용 가능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내가 원할 때 가고 싶은 곳을 갈 수 있으니 몸과 마음이 한결 홀가분해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차올랐다.
생애 첫 차로 어떤 차를 살지 고민하다가 나만의 기준을 세우고 그 안에서 선택하기로 했다. 내가 정한 기준은 다음과 같다. 첫째, 좁은 골목을 다니거나 주차를 할 때 편한 작은 차여야 할 것. 둘째, 도로에 흔히 보이는 대중적인 차 말고 특색 있는 차여야 할 것.
그렇게 선택의 범위를 좁힌 뒤 블로그와 유튜브를 넘나들며 차를 열심히 찾아봤다. 고심 끝에 추린 최종 후보는 폭스바겐 골프와 BMW 120i였다. 이후 틈만 나면 두 차의 리뷰 영상을 보면서 어떤 차를 내 차로 삼을지 행복한 고민에 잠겼다. 전시장 여러 군데를 방문해 시승을 해보고 견적도 뽑았는데, 차를 사는 게 처음이다 보니 이런 과정 자체가 설레는 경험이었다.
심사숙고 끝에 고른 나의 첫 차는 바로 120i. 구매를 결심한 후 전시장에 가서 계약서를 쓰는데, 차량 가격부터 취득세, 공채구입비, 탁송료 등 부대 비용까지 무수한 숫자들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렇게 많은 금액을 내가 부담해야 한다니. 책임감이 막중해지는 한편 진정한 어른이 된 기분도 들었다.
계약서 작성 후 내 차를 만날 날만 애타게 기다리다가 마침내 출고일이 되어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전시장을 찾아갔다. 딜러 분의 안내를 받아 신차 출고장에 들어가자 파티룸 분위기의 화려한 장식과 파란 리본을 단 흰색 차가 나를 맞이했다. 차 트렁크 안에는 우산, 텀블러, 목베개 등 출고 선물과 함께 커다란 꽃다발이 놓여 있었다. 암환자가 되고 나선 위로나 격려를 받는 게 익숙했는데, 오랜만에 기쁜 일로 축하를 받으니 마음이 찡하고도 벅찼다.
내 차를 뽑은 이후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 생기면 즉각 당일치기 여행을 떠나곤 한다. 내가 좋아하는 라디오를 듣고 좋아하는 노래를 부르면서 고속도로를 씽씽 달리면 가슴에 맺힌 울분이 다 날아가는 기분이다. 멀리 떠나온 곳에서 새로운 풍경을 보면 무뎌졌던 감각이 다시 깨어나기도 한다. 내 차는 이제 단순한 이동 수단을 넘어 내가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해 주는 귀중한 존재가 되었다.
언제든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나의 차와 함께 최대한 많은 곳에 가서 발자국을 남기고 싶다. 인생은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지만, 내 차만큼은 내 뜻대로 움직일 수 있으니까. ‘투병 중’이라는 통제 불가능한 상황을 ‘운전’이라는 통제 가능한 상황으로 덮어버리고 아무 일 없는 양 세상을 맘껏 누비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