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당신이 있다
늦었지만 조카에게 생일 선물을 주고 싶었다.
마음에 남을 의미 있는 경험이 좋겠는데 뭐가 있을까? 고민하다 우연히 '여름방학특집 제로웨이스트샵 도슨트' 공지를 봤다. 오, 신선하고 재미있을 것 같아!
상점에서 친환경 소재 제품들을 구경하고, 비닐봉지로 파우치를 제작하는 체험이었다.
"세라야, 방학 동안 여기 가볼까?"
조카에게 넌지시 메시지를 보냈더니 '이모, 나 여기 알아!' 하고 답장이 왔다. 중학생인 조카도 제로웨이스트에 관심이 있었다니! 이야기는 척척 진행되어 남아 있는 날짜에 바로 세 명을 신청했다.
"예약했어!"
"너무 기대된당."
이렇게 해서 우리는 2주 뒤에 만나기로 했다.
도슨트 당일.
조카와 지하철역에서 만나 6호선 망원역으로 향했다.
"이모, 어젯밤에 잠이 안 오더라고."
"나도 그랬는데.ㅎㅎ"
소풍 전날처럼 평소보다 3시간 일찍 눈이 떠진 아침이었다.
일요일 이른 시각 길거리는 조용했다. 아직 열지 않은 가게들을 지나 시장골목을 거쳐 제로웨이스트 상점을 찾아갔다.
"이모, 잠깐만. 여기쯤 있을 텐데."
1층에 보이는 큼지막한 식당 간판만 보고 하마터면 그냥 지나칠 뻔했다. 조카의 길 찾기로 무사히 상점에 도착했다.
계단을 올라가자 가게 앞에 서서 기다리는 두 사람이 보였다. 아무도 없나?
"띵동"
벨을 눌렀더니 '끼익' 하고 문이 열렸다.
"어서 오세요."
하얀 리넨 셔츠에 청바지를 입은 여성 직원분이 우리를 맞아주었다.
대형 편의점 정도 크기인 내부에는 진열대마다 요목조목 다양한 생활용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병뚜껑을 재활용한 크록스 샌들 파츠, 도토리로 만든 브리타 정수기 필터, 유리조각이 재료라고 적혀있는 수정구슬 모양 귀걸이 등.
'이런 것도 있구나!' 신기해하며 구경하는데 천장 쪽에 걸려 있는 패브릭 포스터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당신이 있다."
보이지 않는 목소리가 나를 보고 말하는 듯했다.
곳곳에 쓰여있는 손글씨 안내 메모와 수납장에 촘촘히 늘어선 제로웨이스트 책들까지. 의미 없이 자리한 물건은 매장 어디에도 없었다.
얼마 후, 드디어 상점 도슨트가 시작됐다.
"일요일인데 많이 찾아주셨네요. 여기 와보신 적 있으신가요?"
열두 명의 참여자가 직원의 설명을 들으면서 상점 안을 천천히 구경했다.
이곳은 2018년 쓰레기 대란 때, 망원시장에서 장바구니 대여 캠페인을 하던 작은 모임에서 시작되었다고 했다. 지금의 이 공간이 단 두 개의 세제로 시작되어 이렇게 채워졌다니 감탄이 나왔다.
이제 체험 전까지 막간의 쇼핑타임.
미니멀을 너머 요즘 제로웨이스트에 점점 더 끌리고 있는 나는 오늘을 기점으로 하나씩 실천해 보자며 결심하고 온 터였다.
고심 끝에 고른 건, 세척솔 없이 씻을 수 있고 재사용 가능한 슬라이드 빨대. 색상은 오래 써도 질리지 않을 것 같은 산뜻한 연핑크색과 심플한 화이트 배색으로 했다.
"인쭈랑 세라도 마음에 드는 거 골라봐.
기념으로 선물해 줄게."
인쭈는 양모펠트 선인장 인형을,
조카는 양모펠트 쥐띠 인형을 들고 왔다.
"둘 다 인형을 골랐네?! 신기해~"
제로웨이스트와 무관한 물건이라 조금 아쉬웠지만, 나의 의도보다 아이들의 즐거움이 앞서야 나 없이도 지속될 테니까... 그러고 보면 나도 어릴 때 인형을 제일 좋아했는데.ㅎㅎ
각자 고른 물건을 들고 들뜬 마음으로 체험 장소가 있는 다른 건물로 향했다.
지하 1층 공방으로 내려가자, 길쭉한 테이블 위에 포크와 함께 쑥설기 접시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시원한 음료 한잔씩 드세요."
세심하게 준비된 배려에 시작부터 기분이 좋았다.
'체험은 여자 선생님이 아니네?'
숏컷트에 남색 반바지 차림의 진행자를 보고 순간 남자인 줄 알았다.
"처음 비닐봉지가 나왔을 때는 '이제 나무를 안 잘라도 된다'라고 하면서 친환경적인 의미로 썼대요.
종이백 vs 비닐봉지. 뭐가 더 나을까요?"
버리기 좋은 소재를 찾지 말고 버려지는 것 자체를 경계하는 것이 맞다는 이야기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설명이 끝나고, 비닐 원단 만드는 시연을 즉석에서 볼 수 있었다.
자, 지금부터는 인쭈가 기대하던 만들기 시간! 체험은 차분하고도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1시간 동안 지갑에 버튼을 끼워야 하는데, 잘 뚫리지 않는 원단 때문에 옆에서 끙끙 거리는 인쭈. 친절한 매니저님의 밀착 도움으로 만족스럽게 완성할 수 있었다.
"언니, 내 가방 예쁘지?"
"와~ 인쭈 진짜 잘 만들었다!"
바쁘게 테이블을 정리하던 직원분들이 나가려는 우리를 보며 인사했다.
"아고, 배고프시겠다. 만드느라 수고하셨어요."
"감사합니다. 점심 식사 맛있게 하세요~"
"안녕히 계세요."
그때, 함께 출구로 걸어가던 조카가 갑자기 뒤로 돌아서며 직원들을 향해 조심스레 물었다.
"... 이런 데서 일하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울컥.) 너무 멋지잖아!
연락처를 남겨두고 나오면서, 참여자들 사이에서 워크숍을 진행하는 조카 모습을 상상해 봤다. 뭔가 신나는 일이 생길 것만 같아 마음이 설렜다.
공방을 뒤로하고, 인쭈와 세라가 좋아하는 딸기주스가 있는 카페로.
6층까지 있는 북까페였는데, 엘리베이터 문이 열릴 때마다 만석이었다. 이번 층도 없으려나... 그냥 돌아서려는 순간, 아담한 책장 옆에 숨어 있던 두 좌석을 발견했다.
"엄마랑 나랑 같이 앉으면 되지."
망원동 주택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창가에 셋이 나란히 앉았다. 뭉게구름이 둥둥 떠가는 파란 하늘을 배경 삼아 찰칵! 기념사진을 찍었다.
언니가 읽어주는 그림책을 보다가 인쭈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아까 그 남자 선생님 있잖아.
나 처음에 여잔 줄 알았어."
그 말에, 조카와 둘이 깔깔거리며 웃었다.
주는 내가 더 행복해지는 선물 같은 하루였다.
⋯⋯
뒤풀이.
"이모, 보여줄 게 있어."
조카가 마술 모자에서 뭔가를 꺼내듯 천천히 책가방 속으로 손을 넣었다.
'뿅!' 하고 나온 것은 바로, 그날 같이 찍은 사진까지 뽑아 아기자기 정성스레 꾸며 놓은 스크랩북이었다.
"너무 예쁘다."
하나씩 보고 있는데, 조카가 페이지 한쪽 빈 공간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부분은 이모가 적어줘."
"음~ 알았어."
#팔월이십사일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