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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면

by 이찬

어두웠던 첫 대학 생활이 끝났다. 스트레스를 벗어던지니 몸이 한결 가벼워졌다. 원하던 대로 다 들어주었으니 최소한 집에서는 더 이상 건드리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 생각을 하자마자 나는 호출당했다.

' 네가 자기 계발을 할 건지, 놀건지 빨리 정해. 그리고 계획 세워서 나한테 보여줘. 시간 하릴없이 보내지 마. 취업 준비해야지. '


속으로 헛웃음이 절로 나오는 언행이었다. 모든 음식을 게워내며 공부할 때는 아무 말 않더니 이제 와서 내가 말을 한다. 고등학교 때와 달라진 게 무엇인지 도통 찾을 수 없었다. 내가 아무 계획도 세우지 않고 쉴 때마다 내게 압박을 던져댔다. 나를 가둔 방에서 자유를 조금이나마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게 멍청한 것이었다. 어떻게 하면 무력감을 탈피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절벽 끄트머리에 힘없이 누워있는 나. 나는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아니면 이곳이 절벽이 아니라 땅 위라는 안도감을 바랐다. 나는 당장의 모험보다는 안정감을 택했다.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질문과 대화가 필요했다. 나는 내 부모에게 대화를 청했다. 나의 힘듦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토로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했다. 여기가 나의 마지막이 아니 기를 내심 빌었다.

" 나 사실은 18살 때 저기 위 창문에 올라갔어. 위에 앉아있었어. 많이 힘들었어. 그 이후로도 칼 여러 번 들었어. 알다시피 내가 날카로운 걸 무서워해서 아무것도 못했지만. 그럼에도 들었어. 뭐라도 해보려고. 그만큼 내가 내 인생이 버거웠어. 그때 내 문제집을 찢고 졸업 앨범과 편지가 산산조각 나는 걸 볼 때 내 마음도 같이 찢어졌어. "

" 너만 힘드니? 나도 힘들어. 다들 힘든 거 하나쯤 가지고 사는 거야. 이런 얘기할 거면 됐어. "


나는 무엇을 기대한 걸까. 비릿한 웃음이 지어졌다. 내가 택할 수 있던 길이 하나로 좁혀졌다. 이곳을 나가야만 했다. 대학을 다니고 적당한 공부를 했다. 그리고 주어진 종강에도 나를 압박하던 사람들. 그 사람들에게 힘들었던 나의 과거 몇 줄을 얘기했다고 이런 반응이 올 줄 몰랐다. 너만 힘든 게 아니라니. 그럼 겨우 20살의 내가 얼마나 더한 고통을 견뎌내야 위로를 받았을까. 내가 바라온 건 딱 한마디였다. 미안해. 그 한마디를 듣지 못해 나의 길이 정해졌다.

20살의 나에게 쥐어진 돈은 겨우 백만 원이었다. 나의 생각이 깊어졌다. 어떻게 이곳을 벗어나야 할까. 알리고 싶지 않았다. 알리는 순간 나를 또 이상한 사람 취급할 것이 눈에 훤했다. 나는 어쩌면 탈출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길을 가야 했다. 캐리어의 위치를 알아둬야 했다. 내가 무슨 옷들과 물건들을 챙길지도 정해야 했다. 널찍한 집을 벗어나고 나 혼자 떠날 내일을 생각했다. 머릿속이 복잡하다.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이 대학을 멀쩡히 졸업할 수는 있을까.

집에서 그렇게 바라던 계획을 머릿속으로 세우기 시작했다. 나는 내일 이 집에서 나갈 것이다. 내 방문을 잠근 채 나갈 것이다. 그리해야 아무도 모를 것 아닌가. 작은 캐리어 하나와 큰 가방들에 내 짐들을 넣어 갈 것이다. 미리 내가 지내게 될 고시원도 검색했다. 겨우 백만 원으로 집을 구할 수는 없었다. 하늘이 훤히 보이는 큰 통창과 편안한 침대를 뒤로 한채 2평짜리 작은 방으로 갈 것이다. 내게는 이 큰 창보다 그곳이 더 넓게 느껴질 것이다.


나의 준비는 끝났다. 미리 모든 짐을 가방에 욱여넣어 두었다. 공기청정기와 의자 뒤에 잘 숨겨 아무도 보지 못하게 하였다. 하긴 언제부터 내게 관심이 있었다고. 내가 숨기지 않아도 그들은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혹여 나라는 게 있으니 잘 준비해 두었다. 그렇게 바라던 계획을 이렇게 쓸 줄은 몰랐을 것이다.

나는 이제 이 절벽에서 뛰어내릴 준비가 되어있다. 그게 추락일지 비행일지는 떨어져 봐야 알 것 아닌가. 피투성이가 된 채로 살아남더라도 괜찮다. 조마조마함을 벗어던질 수 있음에 만족한다. 이 방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낸다. 내일의 나는 새로운 비행을 시작할 수 있기를. 자유로히 떠다니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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