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라는 사소한 일로 나의 꿈을 지켰다. 그렇게 입학까지의 길을 버텨왔다. 학교를 다니면 이런 간섭은 조금은 덜하리라 기대하며 지냈다. 입학 후 느낀 건 당연했다. 나와 맞지 않는다. 누구나 알법한 공식 하나도 모르는 내가 이 수업을 듣고 시험을 본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다음 수업까지 붕 뜬 사이에 나는 멍하니 앉았다. 눈앞에 보이는 푸르른 잔디들과 들뜬 학생들. 나만이 이 공간에서 동 떨어진 듯하다.
그 뒤에 들은 수업조차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얘기 투성이었다. 대부분의 대학생들이 이런 감정을 가지는 것은 안다. 하지만 나는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물리라는 과목을 공부한 것만 해도 이미 몇 년 전인 사람이다. 이렇게 모자란 내가 이 자리에 앉아도 되나 싶었다.
수업이 끝나면 셔틀버스를 타고 지하철 역으로 간다. 지하철에서 버스로 한번 갈아타고 종점 근처까지 창 밖을 구경하면 집에 도착한다. 성인이 되고 대학생이 된 나는 여전히 큰 방에 갇혀 지낸다. 이제는 자발적인 일인 것 같기도 하다. 굳이 그들과 마주치고 싶지도 않다. 내가 그토록 싫어하던 곳에 떨어뜨린 사람을 좋아할 수는 없었다.
나의 오늘 하루를 돌아보니 의문만이 둥둥 떠다닌다. 왜 이곳을 왔는지, 무엇을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다. 알고 싶지고 않다. 내가 바라왔던 학과를 다시금 떠올리게 한다. 그곳에 갔으면 지금 떠다니는 질문들이 해결되었을 것 같다. 하찮은 일기 하나로 내 꿈을 버리지 않는 게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든다. 겨우 일기 쓰는 게 무슨 도움이 될까. 나는 결국 방사선과에 진학하였고 병원에 취직할 것인데 말이다. 내 꿈을 버려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 만큼 벼랑 끝에 있다. 아니 이미 떨어져 가는 꿈을 겨우 붙잡고 같이 추락하는 기분이다.
이미 추락하고 있는 이 순간. 이때가 되어서야 후회를 한다. 내가 바라는 곳이 아니면 가지 않겠다고 몰아붙일걸. 내 멋대로 원서를 넣을걸. 꿈을 위해 더 큰 반항을 해볼걸. 이런 수많은 후회 속에 천천히 추락하는 내 모습이 보인다. 이미 길을 잘못 들었다는 예감이 크게 든다. 이대로 갇혀있다간 언젠가 땅 밑으로 처박힐 모습이 상상된다. 내가 이제야 알아차려봤자 무엇이 변하겠는가.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저 가둬둔 방에서 또 공부에 시달리다가 나 자신을 잃을 것이다. 그게 미래이다.
시험이 얼마 남지 않은 날. 나는 하루 3시간을 자며 공부했다. 밥은 먹지 못했다. 다 게워내기 바빴다. 커피도 마실 수 없었다. 내가 원할 때 잘 수조차 없었다. 인간의 기본 욕구조차 하나도 충족시키지 못한 채 공부에 끌려다녔다. 잠을 자지 못해 수업 시간에는 오히려 역효과가 돌아왔다. 쉬는 시간 10분을 쪼개어 잠을 청하고는 했다. 나를 불쌍히 여긴 동기가 커피를 사다 주기도 했다. 이게 정녕 인간의 삶이 맞는가 싶은 일주일을 보냈다. 그러던 중 일이 생겼다.
오늘도 집에 가기 위해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눈앞에 있는 횡단보도를 보며 다른 걸 떠올렸다. 쌩쌩 지나다니는 이 차들에 걸어 들어가면 이 지겨운 일상도 끝이 날까. 내가 서있는 곳에서 딱 한 발짝이면 충분하다. 딱 한걸음만 내딛으면 모든 걸 마칠 수 있다. 멍하게 횡단보도의 무늬를 보며 생각을 이어갔다. 문득 정신이 돌아온 순간이었다. 그때 떠올렸다. 내가 단순히 공부가 맞지 않아서 힘든 게 아니구나. 고작 시험이 싫어서 먹은 걸 뱉어내고 잡을 자지 못하는 상태가 아니구나. 생각보다 나의 상태는 심각하구나. 이제가 되어서야 깨달았다. 그럼에도 내가 바꿀 수 있는 게 없었다. 당장 추락해도 이상하지 않은 나지만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버티는 것뿐이었다.
우리 집은 내 얘기를 들어주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고 내가 혼자 병원을 꾸준히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당장의 돈으로 문을 박차고 나갈 수도, 학교를 관둘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다시금 무력해지는 순간이었다. 나는 이 힘듦을 어디에 토로해야 할까. 어떻게 해소시켜야 절벽 위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더 이상 저 아래를 바라보고 싶지는 않다. 나도 하늘을 보고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