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의 방 구석에는 항상 기타가 세워져있었다. 그 기타 옆 바닥에 놓인 작은 책꽂이에는 언제나 최신대중가요책이 두세권 꽂혀있었다.
형이 없는 날이면 형 방에서 기타를 들고 띄엄띄엄 코드를 잡으며 노래를 하는 정재.
“너는 장미보다 아름…”
“답진 않지만…”
“그보다 더 진한 향기가…”
연주할 수 있는 쉬운 기타 코드로 이루어진 노래를 찾느라 책을 뒤적이던 정재의 눈에 들어온 페이지.
“어…? 애독자 펜팔?”
‘연필 한 자루에 마음을 담아 글과 시로 대화하고 싶은 당신과 소중한 추억을 나누고 싶습니다. 펜팔을 원하시는 분은 엽서나 편지를 보내주세요.’라는 말로 인사를 건넨 페이지는 아래에 수없이 많은 누군가의 이름과 어떤 대상을 원하는지와 그 누군가가 살고 있는 주소를 빼곡히 보여주고 있었다. 정재는 늘 가까이 두고 있었지만, 한 페이지를 넘기지 않아 몰랐던 세계의 문을 연 기분이 들었다.
“동갑이 좋겠지?”
정재는 나이부터 살피기 시작했다.
“김수인… 최은정… 이은주…, 동갑은 세 명이네.”
“김수인은 부산시 남구 광안1동… 광안리 바닷가 근천가? 광안리면 별로 안 머네. 대상은 펜벗. 최은정은… 경주에 살고 대상은 모든 분이네… 이은주는… 강원도 고성군… 너무 먼데? 이성친구. 음…”
정재는 방바닥에 엎드려 눈을 스르르 감고 한 번도 본적이 없는 여자 아이 세명의 모습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광안리 바닷가에서 걷고 있는 김수인, 그 옆에 이정재. 눈부신 모래사장 왼쪽엔 파도가 쏴하고 흰 거품을 만들고, 살랑거리는 수인이의 머리칼, 수인이의 실루엣 뒤로 보이는 눈부신 햇빛. 정재는 수인이의 미소가 햇빛보다 밝다고 이야기를 하다가 눈을 떴다. 정재의 볼이 붉어졌다.
정재는 다시 눈을 감았다. 불국사 다보탑 앞에 다소곳이 서있는 은주. 그 옆에 이정재. 단발머리에 긴 치마를 입고 있는 은주를 세워두고 1회용 코닥필름카메라를 찌리릭 돌리며 사진을 찍어주겠다는 정재. 부끄러워하던 은주는 이내 손가락으로 브이를 만들고 활짝 웃는다. 찰칵! 정재는 다시 눈을 떴다.
정재는 괜히 마음이 두근거렸다.
“휴우…”
정재는 반듯하게 누워 천장을 보고 숨을 한 번 고르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강원도 고성… 눈이 온다. 군인들을 태운 트럭이 지나다니고 버스 정류장 앞에 하얀 스웨터를 입고 서있는 은주. 뽀얀 하늘에서 내리는 첫눈같이 하얀 얼굴에 긴생머리가 찰랑거리는 미소가 아름답다. 그 맞은 편 도로에 이정재. 손을 들어 인사를 나누고 찻길을 건너가는 정재. 하얀 입김을 호호 불며 손을 내미는 은주. 정재도 오른손을 앞으로 내밀어 손가락을 조심스럽게 접고 있었다.
“니 뭐하노?”
트럭에서 뛰어내린 군인 한 명이 퉁명스레 말을 건넨다.
‘응? 날 아는 사람인가?’
“이정재, 니 여기서 뭐하고 있노?”
그 군인은 어깨에 메고 있던 총을 정재에게 겨누고는 무거운 목소리로 묻기 시작했다.
“어…? 저… 아무것도 안하는데요…”
고개를 돌려 은주를 찾는 정재. 은주는 어느새 뒷모습을 보이며 걸어가고 있다. 정재는 두 팔을 뻗어 은주의 어깨를 잡고 은주의 몸을 돌린다.
“은주야…”
은주는 몸은 정재를 향해 돌렸으나, 얼굴은 시커멓게 뚫린 구멍같다.
“은주야… 은주야… 은주야…”
정재는 은주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고 있었다. 강원도의 차가운 겨울바람이 불어 은주의 긴 머리칼이 정재의 얼굴에 자꾸만 닿는다.
“음냐… 음냐… 으음냐…”
“임마 이거 완전 잠꼬대하고 있네.”
정재의 형인 정훈은 반듯하게 누워 잠든 정재의 위에 쪼그리고 앉아 정재의 얼굴에 바람을 ‘후’ 불며 책상 위에 놓여 있던 깃털 볼펜으로 정재의 얼굴을 간질였다. 정재는 얼굴을 움찔거리며 두 팔을 뻗어 형의 어깨를 잡고는 ‘음냐 음냐’ 은주를 애타게 부르고 있었다.
서서히 눈을 뜨는 정재의 눈에 검은 블랙홀 같았던 은주의 얼굴이 뿌옇게 보이다가 조금씩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하얀 스웨터를 입은 은주.
‘왠지 익숙한 얼굴… 어… 시커먼 얼굴? 스포츠 머리? 음흉한 웃음… 정훈이 형?’
“으악!!”
“으어억!!”
정재는 눈을 번쩍 뜨고 고함을 쳤다. 정훈이도 정재의 고함소리에 깜짝 놀라 같이 소리를 질렀다.
“아! 진짜! 형님 뭐하는데?”
“야! 니때문에 내가 놀랬다아이가. 니는 내 방에 누워가지고 뭐하는데? 왜 여기서 자고있노?”
정재는 자리에서 일어나 최신가요책을 챙겨 들고 나왔다.
“와… 진짜… 좋았는데…”
정재는 냉장고 문을 열어 시원한 보리차물을 꿀꺽꿀꺽 마셨다.
정재는 자기 방 책상에 앉았다. 서랍을 열어 편지지를 하나 골라 꺼내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김수인님 안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