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eegang Oct 05. 2023

시간에 대하여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내 인생의 시간으로 뭘 했던가?' 스스로 이렇게 묻지 않고 지나가는 날은 단 하루도 없었다. 입에 캐드버리 초콜릿을 물고 지하철 승강장에 서 있을 때는 이 질문에 평소와는 다른 다급함이 드리워 있었다. 이유를 댈 수는 없었지만, 레이랜드는 현재에 목말랐다.

<파스칼 메르시어, 언어의 무게>



 시간에 대하여 생각해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시간들을요.

 꿈같은 20대를, 일과 육아에 정신없던 30대를, 현재와 미래를 생각하며 나의 존재적 가치를 고민했던 40대를, 비교적 여유를 찾기 시작했던 50대를, 보낸 여자. 과거는 현재에 있고, 현재는 오지 않은 미래에 있다는 것. 과거는 지나가고 사라지는 게 아니라 차오르고 새어 나오는 것이라고 김애란 소설가는 소설 문장에서 썼더군요. 그 문장이 너무나 공감이 되어서 여기저기 많이 인용하기도 했네요. 그러하니 현재 나는 과거의 나와 맞물러 있다는 것. 과거가 새어 나와 현재의 나로 연결되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는 것이지요. 내가 살아온 날이 어떤 형태로든 내장 깊숙한 곳에서부터 공기처럼 배어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을요.


 나는 내 인생의 시간을 어떻게 맞이하고 보냈던가. 주어진 시간으로 나는 무얼 했었던가. 지금 사는 삶이 바라던 삶이었는지. 상상하던 삶이었는지. 파스칼 메르시어(언어의 무게)도 이 질문을 수없이 했더군요. 시간, 나는 이 수많은 시간을 보내는 동안 행복했었던가. 지나간 나의 시간들아, 수없이 외치는 순간들을 문득문득 접하고 있어요.


 오랜 시간 글을 써 왔는데요. 나의 글쓰기는 가족으로부터 기인되었더라고요. 나의 이야기, 가족 이야기를 쓰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지만 내 삶이 가족으로부터 시작되었기에 어쩔 수 없이 쓰고 또 쓰고 축소하고 과장하고 생략하고 그러면서 은유하고. 그런 과정을 딛고 나오며 수필로부터 도망가기 위해 선택했던 것이 사이버대 문예창작학과에 입학하는 것이었던 거죠, 그러한 계기를 마련했음에도 소설은 제대로 시작도 못했어요. 꿈만 꾸다 말았죠. 상상하고 확장하고 훈련하는 과정에서 맞닥뜨린 나의 무능력과 재능 없음에 좌절하고 또 좌절하고…. 나에서 타자로 더 많은 타자로 뻗어나가야 했다는 것을 미처 인지하고 깨닫지 못했었구나 그런 생각이 지금 문득 드네요.



시간이 언제 이렇게 됐지? 상실감이나 무언가를 놓쳤다는 느낌이 아니야. 내 안의 시간. 오로지 나만의 시간을 살아냄으로써 시간의 독재에서 벗어났다는 행복에 겨운 놀라움이고 해방감이지. 이럴 때면 자기 자신에게 머문다는 것이 시간의 극복을 뜻하며, 우리가 측정하고 이야기하는 시간이란 그것과 비교하면 오로지 망상이라는 인도의 교훈을 잠깐이나마 이해할 것 같아. 그 순간을 더 많이 경험하고 싶어서 밝은 대낮에 커튼을 모두 치고 전화선을 뽑아.

<파스칼 메르시어, 언어의 무게>



두려워요. 시간이 지나는 이 지난한 과정이 갑자기 두려워졌어요. 나는 이미 노년의 진입로에 들어선 것 같아서죠. 언제 시간은 이렇게 흘러 버렸을까, 그 물음이 문득 두려움을 몰아온 것 같아요. '내 안의 시간, 오로지 나만의 시간을 살아냄으로써 시간의 독재에서 벗어났다는 행복에 겨운 놀라움과 해방감'을 맛보아야 할텐데, 두려움때문에 일기를 씁니다. 그것 역시 어려움으로 거듭되었고요. 이걸 써서 뭘 하나, 이 무용한 짓들을 나는 왜 매일 하고 있는 거지? 그럴 때면 진짜 나는 아무짝에 쓸데없는 무용한 한 인간이 되어있곤 하더군요. 나는 가난하다는 말에 놀고먹는 한심한 인간으로 낙인이 찍히더라는 것을요. 그럼에도 여전히 목이 마른 부분은 돈이 아니라 문장이더군요.


 “우리의 시간을 멈추는 것은 아름다운 문장뿐이었다.”

 문학에 기대어 살아가는 고요한 삶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시간은 어떻게 흘러가고 있었을까요?


 <언어의 무게> 이야기는 런던의 저택에서 시작되죠. 동양학자인 삼촌을 동경해 번역가를 꿈꾼 어린 시절, 낡은 호텔의 야간경비원, 번역가로 데뷔한 날의 환희, 아내를 처음 만난 열차 안, 아내가 운영하는 출판사 그리고 그곳에서 만난 수많은 문인, 온전히 문학만을 사랑할 수 있던 시절들.

 레이랜드는 과거와 현재를 교차하며 이야기를 이어가죠. 이탈리아와 영국을 오가며 진행되는 이야기. 아내의 출판사가 있던 트리에스테. 삼촌의 저택이 있는 런던. 새로이 만난 사람들. 연적을 죽인 죄로 감옥에 갇히고 그곳에서 한 권의 소설을 읽고 자신이 바라는 여러 결말을 직접 쓴 번역가 안드레이. 약사로서 불법체류자들에게 처방전 없이 약을 내주다 법정에 선 이웃이자 친구인 케네스 버크.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을 소설을 집필하는 프란체스카 마르케세. 돌연 절필을 선언한 젊은 나이에 성공한 작가 메리 앤. 출판 경영인 크리스티 모자. 이들의 삶을 직간접적으로 함께 살아내며 마침내 자신의 소설을 쓰기 시작한 레이랜드. 언어와 문학을 삶의 지침으로 여기며 살아가는 <언어의 무게> 속 인물들. 문학이라는 것이 단순한 애호의 대상이 아닌, 삶을 헤쳐 나가기 위한 도구라는 것. 삶이 문학으로 승화되는 읽고 쓰는 또 하나의 이야기.


 “내가 쓴 글이 곧 나이고, 내가 곧 이 글이니까요.”


 나의 이야기는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을까. 진월면소재지 가난한 농사꾼의 막내딸로 시작된 삶이 여기까지 흘러왔다는 걸, 소설 속 인물들의 삶 속에 제 삶을 끼워 봐요. 누구와 가장 닮은 삶일까. 문학이 내가 지금껏 살아온 동력이었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인데 너무 많은 것을 회피하고 숨기고 거절했었구나, 싶어요.

 제겐 81세의 시어머님이 계세요. 어머니는  팔순을 넘기며 치매가 왔어요. 인생의 숙제인 어머니와 저의 관계. 좋은 관계가 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관계란 것이 참 어렵더군요. 우린 서로 너무 달랐으니까요. 다 말할 수 없는 사정을 숨겨놓고 축소하고 생략하고 불가피한 것들을 피하고 또 피해서 글을 쓴들 누가 그 행간을 다 읽어낼 수 있겠는지요. 나 아닌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현실인걸요. 사람은 누구나 자기 생각이 정답일 것이고, 효와 충을 강조하는 한국적인 정서에서 제가 어떤 말을 여기 쓸 수 있을까요. 많은 글에서 언급했지만 저는 늦둥이로 자랐거든요. 나이가 너무 많은 친정어머니를 둔 저는 젊은 시어머니를 만나게 되어 너무나 좋았어요. 내게도 젊은 엄마가 생겼다는 사실에 진정 좋았거든요. 마치 친정에서 받은 사랑을 젊은 시어머니에게도 똑같이 받을 거라 믿고 있었겠지요. 어찌 감히 친정엄마와 시어머니를 동급 선상에 놓을 수 있었던 건지. (요즘 시대는 가능할까요?) 아무리 사랑이 많은 시어머니일지라도 친정어머니와의 마음의 거리는 감히 측량할 수 없는 거리임을 진정 몰랐던 것은 아니었을 텐데, 저는 그렇게 단순했던 모양입니다.


 시어머니의 시간과 저의 시간을 돌이켜 보았어요. 내 인생의 시간으로 무엇을 했었던가, 스스로질문해 보면서요. 그 시간이라는 것이 어떻게 굴러왔고 굴러가고 이어질 것인지 두려워져요. 앞으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지. 어떻게 살아야 할까. 어떤 삶이 펼쳐질까. 무엇을 해야 하지? 해답 없는 질문들, 말도 안 되는 질문들을 연이어 되풀이하고 있네요. 이러한 질문을 쏟아놓는 이면에는 시어머니가 계신다는 거지요. 어머님이 요양원으로 들어가셨거든요. 오늘로 딱 한 달이 되었어요. 나는 어머님처럼 그렇게 살지 않아야지 수없이 다짐하죠. 어머니의 인생을 돌이켜보기도 하고요. 나의 인생을 돌이켜보기도 하고요. 나는 잘 살아왔나? 나름 잘 살아왔다 생각했는데 아닌 것 같은 거죠. 후회되는 부분들이 참 많더군요. 문장을 수집하는 것을 좋아했던 전 그 일에 너무 소극적이었더라고요. 이쯤 되어 보니 나는 이도저도 아닌 너무나 어중간한 사람이 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지요. 글을 잘 쓰는 것도 아니고 살림을 잘하는 것도 아닌 너무나 어중간한 한 인간. 그 어디에도 어중간한, 무용하디무용한 사람이 되었다는 슬픔…. 그런데 잘 살고 싶어요. 잘 살아내고 싶어요. 온전한 나로요. 어쩜 나도 현재에 목말랐는지 모르겠습니다. ㅎ



바로 균형 감각이지.

뭐가 중요하고 뭐가 중요하지 않은지 언제든 구별하는.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능력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거야. 뭐가 중요하고 뭐가 시간 낭비인지 명확해 보였고, 거기에 대한 토론이나 의의제기는 우습게 생각됐지. 나는 사람들이 빈둥대며 돌아다니고 수다 떠는 모습을 지켜봤어. 어스름한 선잠에 빠져 비틀거리는 이 가련한 존재들은 원래의 삶과 현실로 깨어나지 못하고, 깨어난다고 해도 이미 너무 늦을 테지. 삶을 놓쳤고, 늦잠을 잤고, 졸았고, 온갖 무가치한 일에 사로잡혀 잠을 잔 거야.

<파스칼 메르시어, 언어의 무게>





*컨디션이 좋지 않아 오늘 목요스터디에 빠지고 주절주절 넋두리를 했습니다. 어찌 됐든 매일 쓰는 일기 혼자 보는 일기가 아닌 독자가 있는 일기를 다시 거듭 시작해야겠다는 다짐을 하면서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