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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egang May 13. 2021

"하느님이 축복하시길"

녹스빌 : 1915년 여름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 동네의 저녁이다.

 저녁식사는 여섯 시였고 삼십 분 후면 끝났다. 아직 햇빛이 남아 부드럽고 흐릿하게 조개 속껍질처럼 반짝였고 그 흐릿한 빛 속에서 모퉁이 탄소등이 켜지고 메뚜기가 울기 시작하고 반딧불이가 날아다니고 이슬 맺힌 풀밭에 개구리 몇 마리가 팔딱거릴 무렵 아버지들과 아이들이 밖으로 나왔다. 아이들이 먼저 무작정 서로 별명을 외치며 달려나가고 나면 십자멜빵을 맨 아버지들이 한가로이 뜰로 내려섰다. 옷깃을 풀어 헤친 아버지들의 목이 길고 수줍어 보였다. 어머니들은 부엌에 남아 그릇을 씻고 말리고 치우며 평생 반복되는 꿀벌의 여행처럼 흔적 없는 자신의 발자국을 되밟고 아침에 먹을 코코아 가루를 개량해 두었다. 앞치마를 벗고 어머니들이 밖으로 나오면 치마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어머니들은 현관 베란다 흔들의자에 말없이 앉았다.  




 거칠고 축축한 뒤뜰 풀밭에 아빠와 엄마가 퀼트를 펼쳤다. 우리 모두 그곳에 눕는다. 엄마, 아빠, 삼촌, 이모 그리고 나도 그곳에 눕는다. 처음에 우리는 앉아 있었는데 그러다 한 사람이 눕자 모두 따라 누웠다. 엎드리거나 옆으로 눕거나 등을 대고 눕는다. 그들은 말이 많지 않고 조용히 이야기한다. 별로 특별하지 않은 이야기, 전혀 특별하지 않은 이야기, 아무 이야기도 아닌 이야기. 별들은 드넓고 살아 있다. 별 하나하나 달콤한 미소처럼, 매우 가까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 가족 모두 나보다 크고 잠자는 새의 목소리처럼 부드럽고 의미 없게 조용히 말한다. 한 사람은 화가, 삼촌은 집에서 산다. 한 사람은 음악가, 이모는 집에서 산다. 한 사람은 내게 다정한 우리 엄마, 한 사람은 내게 다정한 우리 아빠. 어쩌다 여기에 그들이 있다. 모두 이 지상에. 이 지상에 있는 슬픔을, 여름 저녁 밤의 소리에 둘러싸여 퀼트 위에 누워 있는 슬픔을 누가 말할까? 우리 가족을, 우리 삼촌을, 우리 이모를, 우리 엄마를, 우리 착한 아빠를 하느님이 축복하시길. 아, 그리고 그들을 친절하게 기억하시길. 그들이 어려운 시간에도, 그들이 떠난 시간에도.


제임스 에이지 <녹스빌:1915년 여름> 중


...


  제임스 에이지(1909~1955)는 미국의 시인이자 소설가이다. 1909년에 테네시, 녹스빌에서 태어났고 여섯 살에 우체국 직원이던 아버지를 교통사고로 잃었다. <녹스빌:1915년 여름>은 아버지를 잃기 직전 어느 여름날 저녁을 회상한 글이다.

  2017년 5월이었던가. 약속시간보다 일찍 도착한 나는 근처 서점으로 들어갔다. 스카이 블루 파스텔톤의 책 한 권을 펼쳤다. 영미 작가들의 산문집 <천천히, 스미는>이었다.

 옮긴이의 글을 먼저 읽고 첫 번째 두 번째를 건너뛰고 세 번째 작품 제임스 에이지의 <녹스빌:1915년 여름>을 읽었다. 그날 나는 이 책을 들고 약속 장소로 향했다. <천천히, 스미는>은 그렇게 내게로 왔다.

 

 그날 <녹스빌:1915년 여름>을 읽는 중 나는 눈물을 훔쳤다. 1915년의 녹스빌의 여름은 70년 초 내가 살던 진월의 여름 저녁과 너무나 흡사했다. 주체할 수 없는 감성의 소용돌이가 나의 온몸을 휘감고 지나갔다. 읽고 또 읽었다. 그 부분을 다 욀 수 있을 정도로 읽었다. 오늘 다시 나는 이 책을 펼쳐 <녹스빌:1915년 여름> 부분을 읽는다. 매번 읽을 때마다 감성을 스치는 부분이 다르다. 지겨울 만도 한데 읽을수록 마음을 울린다. 그 여름 저녁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마당과 뜰 나무와 바람 모깃불과 평상. 풀냄새와 나팔꽃. 장독대와 접시꽃 밤꽃 냄새와 후덥지근한 여름 저녁 ...


 “그들은 말이 많지 않고 조용히 이야기한다. 별로 특별하지 않은 이야기, 전혀 특별하지 않은 이야기, 아무 이야기도 아닌 이야기를 나눈다.”


 별로 특별하지 않은 이야기 전혀 특별하지 않은 이야기. 아무 이야기도 아닌 이야기이지만 가장 특별하고 엄청 특별하고 인생을 가로지르는 핵심 이야기가 되는, 그때 나에게 그랬고, 지금 나에게 그렇다. 천천히, 스미는 그 이야기가 아주 중요했고 아주 특별했다. 부드럽고 의미 없게 조용히 말하는 그 말들 속에는 ‘내게 다정한 우리 엄마, 내게 다정한 우리 아빠. 어쩌다 여기에 그들이 있다.’ 내게 다정한 우리 남편이 내게 사랑스러운 우리 딸이. 어쩌다 여기에 그들이 있다. 나의 전부인 그들이 있다.

 

 ‘우리 가족을, 우리 삼촌을, 우리 이모를, 우리 엄마를, 우리 착한 아빠를 하느님이 축복하시길.’

 ‘아, 그리고 그들을 친절하게 기억하시길. 그들이 어려운 시간에도, 그들이 떠난 시간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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