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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전설

2022. 3. 15.

by leegang


오후엔 버스를 타고 쌍계사 십 리 벚꽃길을 달리다가 저녁때까지 섬진강 둑을 내내 서성거렸다. 강에는 서까래처럼 생긴 쇠판으로 바닥을 긁어 올려 재첩을 잡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눈에 띄었는데 그때에도 구례 상류에서 내려온 물은 모래와 몸을 다투며 하동 하구 쪽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겨울을 시퍼렇게 견뎌낸 강 건너편의 전라도 대나무숲이 바람에 이리 쏠리고 저리 흔들리며 아직 잠에 덜 깬 이쪽 경상도의 벚나무들을 킬킬거리며 바라보고 있었다.


윤대녕 <3월의 전설>






3월이 되면 윤대녕의 소설 <3월의 전설>을 찾아 읽는다. 갱조개(재첩)가 자라는 강, 섬진강 물줄기가 마음으로 흐르는 그 문장을 따라가다 보면 거기 그곳에 내가 선 듯 착각을 일게 한다. 나는 소설을 읽는 것이 아니라 그 풍경을 읽는지도 모른다. 그가 펼쳐가는 이야기를 따라 강줄기며 벚꽃길이며 섬진강 둑이며 그곳 풍경을 나도 모르게 훑어간다. 거기 어디쯤에 자라는 나무. 거기 어느 골목길을 돌면 보이는 바위. 모랭이를 돌아서면 또 다른 모랭이가 연결되고 모랭이 모랭이 굽이굽이 끝없는 모랭이길. 몇 개의 모퉁이를 돌고 돌아 매티재를 넘다보면 길게 내리막길이 이어진 그 끝 어디쯤 우뚝 선 나무 한 그루. 내 마음은 그 길을 꿈결처럼 걷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순식간에 슬픔 같은 그 무엇이 마음에 들이차면서 그곳으로 달려가고 싶어진다. 거기 골목길도 모퉁이도 나무도 기억 속에 선명한데, 그곳은 지금 너무 많이 변해 버렸다. 좁은 국도는 다 사라지고 새로 난 도로는 거리와 시간을 단축시켰지만 내 마음에 난 길과 들은 모두 지워 버렸다. 그래서 슬픈 건지 그래서 그리운 건지 모를 거기 그곳을 생각할 때면 아직 자라지 않은 어린 내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다. 그때가 그리운 것이다. 나에게도 행복한 어린 날이 있었다는 것이 참을 수 없는 감격으로 밀려드는 것이다.


(‘바닥을 긁어 올려 재첩을 잡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눈에 띄었다’는 문장을 다시 읽는다. 내 안의 강 유년의 강 섬진강. 선포마을 앞 잔잔한 강물결이 훅 펼쳐진다. 모두들 허리를 숙여 갱조개를 줍던 어린 꼬맹이들, 강 저쪽은 옥곡, 강 이쪽은 진월이었다. 거의 4키로를 걸어서 강으로 갔다. 진목마을을 지나 삼정마을을 지나 선포마을에 다다랐다. 강물이 보일즈음엔 마구 강으로 향해 뛰었다. 함께 갔던 어른들은 기억에도 없고 모두들 나와 같은 쪼무래기들. 언니들도 있었고 나보다 어린 동생들도 있었다. ‘바닥을 긁어 재첩을 잡는 사람들’이라는 이 짧은 윤대녕의 문장에서 끌어 올린 어린 날의 한 장면을 나는 지금 살뜰히 보살피고 있다. 환한 꽃 같은 날이었다. 일제히 강물로 뛰어들던 그 장면이 내 속엔 판화처럼 새겨져 있다. 그 강에서 갱조개를 줍던 날이 가슴이 아프도록 그립고 설렌다. 벚꽃이 피는 시기에 재첩을 잡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보인다고 소설은 말하지만, 우리는 여름방학이 되면 강으로 나가 재첩을 잡았다. 그때는 재첩이라 부르지 않았고, 아니 재첩이란 단어를 몰랐다. ‘갱조개’라고 했다. 강물에 발을 담그면 온통 갱조개가 쌓여 있었다. 그저 강에 나가 멱을 감듯 놀면서 바구니에 재첩을 주워 담았던 기억이다. 재첩의 제철은 여름이라 여겼던 것인데 소설을 통해 바로잡았다. 백과사전엔 4월-6월이 재첩을 잡는 적기란다. 매화가 피는 시기 벚꽃이 피는 시기에는 횃불을 들고 저수지 위 계곡으로 어른들은 참게를 잡으러 갔다. 내 기억이 맞는지 모르겠다.)


올핸 벚꽃 핀 그곳에 가닿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3월의 전설>을 바라보는 시선이 내생각과 비슷한 함정임의 문장도 함께 옮긴다.




봄이면 쌍계사를 꿈꾸곤 했다. 쌍계사, 화개, 다솔사를 무대로 펼쳐지는 김동리의 단편 <역마>를 읽은 뒤였다.

쌍계사에는 봄에, 그것도 산수유 벚꽃 만발한 상춘절에 가야 한다는 생각이 더욱 간절해진 것은 윤대녕의 단편 <3월의 전설>을 읽은 뒤였다. 이 소설에 따르면 봄이 오면 쌍계사, 화개로 향하는 것은 본능과 관계된 일이다. 화개, 이름만으로도 “마음이 되게 어지러워지고”, 닿지 않으면 병이 도지는 신비로운 곳이다. 죽음에 이르는 치명적인 병처럼, 한번 빠지면 헤어나기 어려울까 봐 부담스러웠던 것일까. 나는 하동 포구, 평사리, 악양, 화개, 구례, 다솔사를 오가면서도 정작 쌍계사에는 닿지 않았다. 세월 속에 역마살의 운명도, 3월이면 도지는 병(전설)도 겨울햇살처럼 말갛고 담담해졌다.


함정임 <괜찮다는 말은 차마 못했어도>



2년 전에 찍은 광양 매화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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