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YEONGBOK ROYAL PALACE / AUTUMN
갑자기 날씨가 추워졌다. 아침저녁으로는 옷장 안에 넣어두었던 패딩을 꺼내서 입어야 할 정도로. 그 덕분에 나무들이 단풍이 채 물들기도 전에 서둘러 잎을 떨어내고 겨울을 준비하고 있다. 오랜 시간 기다렸던 가을을 생각보다 훨씬 빨리 떠나보내야 할 것 같다. 제대로 인사 한 번도 못하고 겨울이 찾아올 것 같아 나도 모르게 초조함이 느껴졌다. 휴일이었던 오늘 카메라를 들고 무작정 밖으로 나갔다. 경복궁에 도착하니 하늘에선 빗방울이 하나둘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보통 관광객들은 경복궁을 방문하면 인정전과 대조전, 경회루, 그리고 향원정을 중심으로 궁을 둘러보게 된다. 물론 경회루와 향원정 주변의 단풍도 참 아름답지만 개인적으로 경복궁에서 가을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곳은 궁궐 동쪽 끝자락에 위치한 건춘문이라고 생각한다. 서쪽의 영추문과 짝을 이루는 건춘문은 오행(五行)에서 동쪽을 상징하는 계절이 봄이므로 이와 같이 이름 지어졌다. 경복궁 창건 당시 세웠던 문은 임진왜란 때 불탔으며, 고종 때 중건한 지금의 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을 돌로 된 석문 위에 세운 것이다. 건춘은 ‘봄을 세운다’는 뜻이다. ‘건(建)’은 입(立)과 통하므로 이를 입춘(立春)의 의미, 즉 ‘봄이 시작된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오늘, 아이러니하게도 봄이 시작되는 문에서 깊은 가을의 끝을 만날 수 있었다.
건춘문 앞에는 커다란 은행나무가 한그루 있다. 아마 경복궁 안에 있는 은행나무 중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나무가 아닐까 싶다. 수령은 정확하진 않지만 200~300년 정도 되었을 것 같다. 이 오래된 은행나무 주변에 쉴 수 있는 벤치가 마련되어 있는데 앉아서 준비해온 따뜻한 커피와 샌드위치를 먹기에 참 좋은 공간이다. 궁궐 끝쪽에 위치하고 있어서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아 혼자 조용히 시간을 보내며 복잡한 머릿속 생각들을 하나씩 정리하고 싶을 때도 좋다. 언제 찾아도 편안한 쉼터이다.
건춘문 앞에 도달했을 때 나도 모르게 입에서 반가움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도심 속에서는 찾아도 잘 보이지 않았던 농익은 가을이 눈앞에 펼쳐지니 신이 날 수밖에 없었다. 거리의 은행나무들은 벌써 잎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건춘문 은행나무는 잎이 얼마 떨어지지 않아서 풍성했다. 바닥에 노란 은행나무 잎이 조금 깔려 더욱 아름다웠다. 혼자 이리저리 한참을 뛰어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내 모습을 보고 지나가던 중국인 관광객 커플도 와서 사진을 찍고 갔다. 한 시간 정도 사진을 찍었을까. 궁 관람시간이 끝나갈 무렵에는 비가 그치고 파란 하늘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해서 마지막에는 조금 다른 느낌의 사진도 담고 나올 수 있었다.
매년 가을은 작년보다 훨씬 빨리 지나가는 느낌이다. 이 계절, 뭐가 그렇게 급하길래 오자마자 떠나는 걸까. 아니면 시간은 똑같이 흘러가는데 이제 나도 나이를 먹어 유독 그렇게 느껴지는 걸까. 해가 갈수록 가을을 많이 즐기지 못하는 것 같아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그래도 다행인 건 건춘문 은행나무는 이번 주말까지 볼만할 것 같다. 주중에 시간을 내서 한 번 더 방문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