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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양희 Feb 12. 2023

물고기와 김장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 어른 김장하

​엄마는 늘 이야기한다.


“진아 인생이 참 짧아. 엄마가 살아보니 시간이 눈 깜짝할 새 지나가 있더라. 그래서 지금 순간을 아주 소중하게 보내야 해.” 맞는 말이다.


나에게는 지금 너무 많은 시간이 주어져있다. 미국으로 오기 전에는 했어야 하는 일들이 가득한 사회 속에서 하고 싶은 것들을 미뤄왔었다. 미국에 온 후, 해야 할 일에서 벗어나 막상 이 많은 시간이 주어지니 당장 무엇을 해야 시간을 잘 보내는 것인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라 막막한 마음이다. 그래서 지금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일인 독서와 다큐멘터리 보기 등으로 텅 빈 시간의 공간을 채워가고 있다. 이 활동들이 내 인생의 방향성을 잡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하면서 말이다.


사람이 인생의 방향성을 결정하거나 혹은 기존의 방향을 바꾸게 되는 몇몇 순간들이 있는데, 대게는 인생에서 큰 위기를 봉착했을 때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되돌아보면서 새로운 인생의 모토와 마음가짐을 찾게 되는 것이다. 책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의 작가 룰루 밀러가 그랬고,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의 취재기자 김주완이 그랬다.


룰루밀러는 여름휴가 중 한 소녀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는 한순간의 실수로 무너져 버린 그녀의 삶을 다잡기 위해 한 인물을 발견하여 취재하기 시작했다. 그 사람이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다. 이제 막 신문사의 임원자리에서 은퇴한 김주완은 인생의 새로운 챕터를 맞이하면서, 신문사 운영보다는 글 쓰는 재주를 다시 활용해 스스로를 재정비하고자 지역사회에 의인 김장하 선생을 취재하게 되었다. 두 기자들이 각자가 처한 상황에서 자신의 삶에 변화를 가져다줄 인물들을 선택해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게 된 것이다.

룰루밀러는 책 초반,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생애를 주목하면서 그가 이룬 학문적 성과와 두 번의 재앙(지진과 화재) 속에서도 수 천 개의 물고기 표본을 차분하게 다시 쌓아 올린 일화들을 통해 자신도 조던처럼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사람이 되고자 했다. 하지만 계속해서 이어지는 취재 속에서 조던의 살인 혐의와 우생학이라는 잘못된 지식 전파로 희생된 사람들을 알게 되며 그의 생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생긴다. 조던은 우월한 유전자가 존재하며 열등한 유전자의 확산을 막아야 한다는 우생학 이론을 펼쳤다. 밀러는 진화생물학의 관점뿐만 아니라 그가 일기에다 쓴 자기모순적 주장들로 조던의 오류를 책에 기술했다. 그리고 우생학의 희생자인 불임 강제 수용소 생존자 두 여성을 취재하며 ‘민들레 법칙’을 발견했다. 자연에서 생물의 지위를 매기는 단 하나의 관점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생명체는 서로의 관계 속에서 개별존재의 중요한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것. 마지막으로 룰루밀러는 조던이 일생을 바친 분류학에 따른 어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컴퓨터의 등장에 따라 밝혀지면서 위대한 학자로서의 그의 성과도 부정당하게 되었음을 설명한다.


김주완 기자가 취재한 김장하 선생은 화수분처럼 미담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사람이다. 어려운 유년기를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김장하 선생은 경남 진주에서 한약방을 운영하면서 고등학교를 설립해 국가에 헌납하는 한편, 많은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수여했다. 모든 이들의 사회 환원은 의로운 일로서 칭송받아야 하지만 그가 더욱 특별한 이유는 스스로를 치켜세우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돋보이는 것을 싫어해 인터뷰에도 응하지 않아 지역에서 조차 그의 선행을 모르는 이들이 더 많다고 한다. 김주완 기자가 선생을 취재할 때도 직접 인터뷰를 하는 것이 어려워 대부분 그를 둘러싼 지인들을 통해 정보를 얻었다. 평소 기자가 주변인을 취재할 때는 그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꺼려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번 취재에는 모두가 김장하 선생에 대한 존경을 표하며 그의 선행이 사람들에게 알려지기를 바랐다. 특히 장학금 수혜를 받은 인물들의 일화들이 소개되면서 김장하 선생의 성품이 더욱 드러났다. 교수, 판사 등의 걸출한 인재가 된 사람도 있지만 특별하지 않은 사람이 되어 미안하다는 장학생들에게도 선생 자신이 바란 것은 그런 것이 아니라며, 평범한 사람들이 우리 사회를 지탱하고 있다고 격려했다고 한다. 아무 요구사항 없이 장학금을 베푼 것에서 선행이 그치지 않았다. 다양한 사회 문화 활동의 장려를 위해 재단을 세우고, 가정폭력 피해자의 거처를 마련하는 등, 문화, 여성, 환경, 역사 등 다양한 분야에서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진정한 어른으로 존경할 수 있는 인물인 김장하를 취재하며 김주완 기자는 의인을 사회에 알리고 그로 인해 긍정적 파급효과가 생기는 것에 큰 뿌듯함을 느꼈다. 젊은 시절 취재해 온 기득권층의 부정부패 고발 뉴스에도 나름의 의미가 있었지만 스스로가 더 쓸모 있다고 생각하는 효능감을 어른을 취재하며 더 느끼게 된 것이다.


두 기자는 취재를 통해 스스로의 삶에도 큰 변화를 불러왔겠지만 사회에도 분명한 파급력을 가지고 왔다. 데이비드 조던은 역사적으로 재평가되며 스탠퍼드 대학에 있던 그의 동상은 철거가 되었고, 김장하 선생의 다큐멘터리는 유튜브에서 거의 34만 뷰를 기록하며 닮고 싶은 어른 상으로 매스컴에 나오고 있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큰돈을 벌고 싶다가도 소박하게 살고 싶고, 뭔가를 이루고 싶은데도 무엇을 잘하는지 모르겠고 사회에 이로운 일을 하고 싶은데도 그 방법을 몰랐었다. 여전히 그 답을 모르지만 좋은 책과 좋은 다큐멘터리를 보며 한 가지 얻은 사실은 무슨 일을 하더라도 온전하고 온화한 마음을 가져 내가 한 일이의 결과에 진정성을 불어넣어야겠다는 것이다.


‘어른 김장하’를 통해 닮고 싶은 어른을 만나고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통해 경계해야 할 모습과 개체 및 개별 관계가 지닌 소중함을 알게 되었다. 나이가 들어가며 자동적으로 되는 어른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에게 어른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 내가 만든 발자취가 작게라도 그 누군가에게라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게 살아야겠다고 다짐하게 된다.


나도 취재를 시작해야겠다. 내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영웅적 면모를 가진 인물을 말이다. 내 영웅의 인간적 면모를 통해 글로써 감동을 전할 수 있는 이가 지금은 가장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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