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 개의 1미터의 삶’이라는 제목의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다. 실제로 내가 자라오며 봤던 많은 개들이 그렇게 살았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맥스와 꼬물이도 1미터짜리 줄에 묶여, 산책할 때를 제외하곤 그렇게 지낼 때가 잠깐 있었다.
그 짧은 줄이 애달프기도 했다. 산책할 때는 더없이 자유로운 애들이지만 묶여서 내내 산책 시간만을 기다릴 강아지들을 생각하면 미안한 마음이 절로 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당장 울타리를 해주거나, 내가 집을 마련해서 강아지들을 데리고 나가 책임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산책을 열심히 나가는 것뿐이었다.
동생도 비슷한 마음이 들었던지 어느 날 10미터짜리 줄을 샀다. 그리고 그 10미터짜리 줄은 얼마 안 가 아빠의 손에 반토막이 났다. 동생은 화를 참지 못해 아빠와 싸웠고, 10미터의 줄이 반토막이 난 이후로 아빠와 동생 사이의 거리는 1미터와 10미터의 거리보다는 더 벌어졌을지도 모른다. 아빠와 우리 사이에는 1미터와 10미터만큼의 사고방식의 차이가 존재했다. 다툼 끝에 결국 맥스와 꼬물이는 한동안 1미터짜리 줄에 묶여 마당에서 지냈다.
우리가 서운했던 감정이 무색하게 아빠의 의견은 모두 옳았다. 10미터짜리 줄은 너무 길어서 툭하면 엉키고 애들 몸을 칭칭 감았다. 맥스와 꼬물이가 서로 닿으면 줄이 엉키고 마는데, 자력으로는 풀 수 없으니 꼭 사람이 풀어줘야 했다. 행동반경을 넓혀주려다 오히려 꼭 엉켜 있거나 꼬이게 되어서 채울 수 없는 줄이었다. 빨랫줄 같은 데 연결해서, 줄을 머리 위로 달아야 하나 생각도 해봤지만 실행하기가 어려웠다. 결국엔 맥스와 꼬물이는 1미터짜리 줄에 묶여 잠시 지냈다.
그 뒤로는 1미터와 10미터의 간격에 대해 줄곧 생각해보곤 한다. 1미터든 10미터든 제한 없이 남들처럼 집 안에서 같이 지내며 산책할 때만 목줄을 하는 게 더 행복하겠지? 나는 맥스와 꼬물이와 같이 사는 걸 꿈꾸고 있다. 하지만 내 주위 촌 동네 어디를 둘러보든 강아지들은 묶여 있다. 아주 가끔 산책을 나서기도 하지만. 그래도 예전보다는 강아지들을 산책 시키는 어르신들이 늘었다. 종종 목줄을 하고 농로를 산책하고 있는 사람과 강아지를 보면 덩달아 행복해진다. 강아지의 표정이 너무 행복해서.
언젠가 우리 집 강아지들과 함께 마당에서 노는 사진을 친구가 보고 자기가 키우는 강아지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고 한 적이 있다. 나는 절대 그렇지 않다고 거의 20년이 되도록 소중하게 돌본 가족인데 그럴 리 없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정말 조금도 그 친구가 강아지에게 소홀하거나 못해 줬다고 생각지 않았다. 오히려 강아지를 사랑하는 친구를 보고 나는 늘 배웠다. 저렇게 소중하게 존재를 대해야 하구나. 오랜 시간 가족으로 살아가려면 정말 신경 쓸 게 많구나. 그에 비하면 우리 집 아이들은 방치하면서 키우는 격이지.
친구와 대화한 때가 오래 기억에 남았다. 그런 고민을 전혀 하지 않을 것 같았는데 소중한 가족에게는 늘 못해 준 거, 부족한 게 먼저 떠오르나 보다. 우리 모두가 얼마쯤은 타협을 하며 살아간다. 시간도 한정적이고 이러저러한 여건도 한정적이다. 그 안에서 해줄 수 있는 것을 하지만 다른 모든 이들이 나보다 더 나은 환경에서 강아지를 키우는 것 같다. 좋은 사료와 간식과 놀이와 산책. 그리고 병원까지. 가끔은 그렇게 하고 싶어도 못 하는 상황에 박탈감을 느끼거나 내 탓을 하게 되기도 하지만, 역시 반려동물을 키우는 많은 사람들이 더 나은 방식으로 동물을 대할 수 있게 된 건 좋은 일이다.
나는 내가 만나지 않았던 개들, 책에서 본 개 중에 딱 두 마리를 종종 떠올리곤 한다. 러시아에서 최초로 우주로 생명체를 날려 보내는 프로젝트에 참여한 우주견 라이카. 그리고 노숙자의 곁을 지키고 있던 이름 모를 개. 그 두 마리가 자주 떠올리곤 하는 내가 만나지 않은 개들이다. 라이카는 인간의 욕심 때문에 희생된 모든 개들을 자꾸 떠올리게 만들고, 노숙자의 옆에 머물던 개는 모든 것을 잃고 그저 디딜 수 있는 땅 위에 몸을 뉜 사람의 친구가 되어주는 존재라는 걸 생각하게 한다. 나는 라이카와 이름 모를 개 사이에서 개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려고 애쓴다.
그리고 어쩌면 내 삶도 1미터와 10미터 사이에서의 타협과 방황으로 이루어졌는지도 모르겠다. 언젠가는 줄을 끊고 나도 강아지들도 맘껏 뛰놀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