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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우 Sep 30. 2024

무정 리뷰  [이광수]

사랑으로 무력감 돌파하기

이토록 무정한 세상에서 우리가 나아가야할 길은.

작가 이광수의 생각을 빌리자면, 그것은 사랑이다.


[초반 줄거리]

형식,영채,선형,병욱. 작가는 이 네 사람의 관계를 얽혀놓은 채 1910년 조선에서 나타난 신사상과 구사상의 대립을 논하며 당시 조선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다.

일제 치하로 들어간 당대의 조선에서 정은 사라진지 오래이다. 도저히 극복해낼 수 없는 힘에 굴복하게 되어버린 이곳엔 무력감만이 남아있다. 

그런 세상에서, 윗 세대들은 오로지 아랫세대를 이용할 궁리만 하고 있고 아랫 세대는 세상을 이렇게 만든 윗 세대를 혐오한다. 그 어느때보다 세대갈등이 극도로 치달았던 1910년 조선의 실상이다.(2024년의 대한민국과 비슷하다.)

오직 이형식만이 교육이 조선을 구원할 것이라 믿으며 그 뜻을 이루어 내려한다.



[리뷰]

그렇다면 이미 무정해버린 조선에서 다시금 정을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이란 과연 무엇일까.

마지막 기차역에서의 음악공연 장면에 대해 논란이 많다. 많은 사람들이 이를 기이한 상황으로 치부하는 듯 한데 나는 그것이 이 소설의 핵심이며 이광수가 말하고 싶었던 것이라 본다.

돌이켜보면 소설 전 내용을 통틀어 오직 그 마지막 장면에서만 '정'이라는게 작동한다. 

넘쳐흐르는 붉은 강물들로 인해 갈 곳도 잃고 가진 것도 모두 잃어버린 조선인들. 그러니까 일본의 제국주의로 인해 하루 아침에 모든 민족성을 잃어버린 조선인들은 무력감에 빠져있다. 

그러니 서로에게 무정해질 수 밖에.


그러나 우리의 이형식일행은 달랐다. 서로에 대한 개인적 사랑의 가치를 경험한 이들은 그 '사랑'을 나누어 줄만한 힘이 있다. 그러니까 이광수의 주장으로 개인과 개인 사이에 작용하는 사랑은 그 전염성이 있어서 저절로 넘쳐흐르게 된다는 것이다.

당대 조선질서에서, '개인적 사랑'이란 억압되어야만 했던 것이고 남녀간의 '공식적인 정'은 부모가 정해주는 것이었으니, 그 '공식적인 정'이라는 것은 외부(일제)의 힘에 무너지기 너무 쉬운 것이었다. 그러니 무정해지고 무력해지기 쉬웠던 상황에 놓여있었던 것이다. 조선 500년동안. 애초의 본인의 결과가 아니라 사회가 얻어주었던 것이니 너무나 쉽게 잃어버릴 수 밖에. 


연주회가 진행되고 열차 안 사람들(부유층)은 감동을 받는다. 그들(이형식일행)의 사랑에 의해 발현된 정을 느끼게 되고 비로소 위험에 빠진 조선인들을 구해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봉건적 질서(부모가 맺어주는 혼인)에서 벗어난 개인적 사랑의 힘이 곧 조선인들의 무력감을 해방시켜주는 것이고 그때부터 조선의 재건국이 다시 시작되리라는 작가의 마음이다.


개인의 변화가 곧 세상의 변화를 이뤄낸다는 점에서 이광수는 굉장히 민주적인 방법을 생각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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