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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국희 Jan 20. 2021

훌륭한 연출의 조건

지각적 표상(Perceptual representation)

드라마나 영화계에는 말로 일일이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을 하나의 상징적 장면에 녹여내는 표현의 대가들이 있다. 남녀가 서로 알콩달콩 사랑을 꽃피워가는 장면을 '지금 두 남녀는 사랑을 꽃피워가는 중입니다'라고 설명하는 것은 연출이 아니다. 이건 그냥 서술이다. '남자가 평소 즐겨먹지 않는 메뉴를 여자를 배려하기 위해 즐겨먹는 척한다' 혹은 '여자가 원래는 좋아하지 않는 일을 그 남자를 배려하기 위해 한다' 등이 바로 연출이다. 연출과 서술이 의미하는 바는 동일하다. 그러나 느껴지는 재미는 전혀 다르다. 사실을 서술해 둔 것은 정말 재미없다. 그러나 그것을 연출해 놓으면, 인간의 상상력을 자극하면서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지고, 재미가 있다.


어떻게 대중들의 사랑을 받는 드라마 작가와 감독들은 이렇게 연출을 잘할까? 비결이 뭘까? 이 질문에 대한 쉬운 대답은 딱 정해져 있다. '타고났다'는 대답이다. 그러나 쉬운 대답은 대부분의 경우 정답이 아니다. 오히려 이런 쉬운 대답은 훌륭한 연출가들을 모욕하는 말일 수 있다. 왜냐고? 그들은 그런 식으로 타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두 노력파이다. 훌륭한 연출가는 세상의 상징물들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기억하려고 노력한다.


훌륭한 연출가는 인간의 감각기관에 포착된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공부한다. 훌륭한 연출가는 어떻게 시각적 자극이 냄새가 될 수 있는지 연구한다. 훌륭한 연출가는 어떻게 소리가 감정이 될 수 있는지 연구한다. 훌륭한 연출가는 인간의 표정과 자세가 어떤 의미를 전달하는지 공부한다. 카메라를 사용하고, 조명을 사용하는 방법에 따라 의미 전달이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 배우들이 서 있는 위치에 따라 이야기가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 연구한다. 장면들이 어떤 순서로 제시되는지에 따라 이야기의 의미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공부한다.


이렇게 열심히 공부한 사람들을 '타고났다'라는 한 마디로 정리하려고? 죄송하지만, 나는 그러지 못하겠다. 훌륭한 연출가들의 노력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아서, 도저히 양심에 찔려서, 그분들을 모욕하기 싫어서 그러지 못하겠다. 그리고 그분들의 세밀한 관찰, 독서, 다른 사람의 작품과 연출에 대한 꾸준한 연구,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에 박수를 보낸다. 또 그런 일을 반복하면서 계속 창의적인 작품을 내놓고 계시는 분들께는 두배 세배로 박수를 보내고 싶다. 이 분들이야 말로 진정한 공부의 대가들이자, 본받고 싶은 롤모델들이다.



뛰어난 패션 디자이너, 뛰어난 건축 디자이너, 뛰어난 만화가, 뛰어난 애니메이션 제작가들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모두 '인간의 감각 기관에 포착된 세상의 한 장면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한 공부가 깊은 사람들이다. 심리학자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세상에 있는 '지각적 표상(perceptual representation)'에 대한 지식이 많은 사람들이다. 지각이라는 것은 감각에 대한 해석을 말한다. 눈에 맺힌 것의 의미, 귀에 들린 것의 의미가 바로 지각이다. 표상은 다시라는 뜻을 가진 're'와 표현, 표시, 발표 등의 뜻을 가진 'presentation'의 합성어인데, 언제든지 다시 불러오기 할 수 있는 표시라는 뜻이다. 즉 지각적 표상은 언제든지 다시 불러오기 할 수 있는 감각에 대한 해석을 말한다.


일일이 언어적으로 설명하지 않아도, 장면 하나를 연출함으로써 모든 것을 이해시키는 대가들은 지각적 표상을 풍부하게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지각적 표상을 특정한 상황과 맥락, 스토리에 맞게 변환시켜서 새로운 장면을 만들어내는 것을 바로 '심상(imagery)'이라고 부른다. 쉽게 말해, 연출가들이 지각적 표상들을 새롭게 각색하여 사용하면, 그것이 심상이다. 연출가들이 상상력, 창의력을 발휘하여 표현해낸 장면이라고 생각하면 좀 더 이해가 쉬울 것이다. 또한 패션 디자이너가 새롭게 디자인한 옷도 심상이고, 만화가 새롭게 그린 인물이 바로 심상이며, 건축가가 새롭게 설계한 건축물도 심상이다. 작곡가가 새로운 작곡을 하는 것도 청각적 심상이고, 요리가가 새로운 메뉴를 개발하는 것도 후각적 심상이다.


대중들이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콘텐츠는 모두 연출가들의 '심상'이다. 대중들은 연출가들의 내면을 보는 것이 아니라, 연출가들의 만들어낸 결과물만 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마치 이런 것을 하려면 타고난 감각이 있어야 되는 것처럼 착각한다. 그러나 풍부한 심상이라는 결과물은 풍부한 '지각적 표상'을 가지는 것에서 나온다. 그리고 풍부한 지각적 표상을 가지기 위해서는 엄청난 공부와 연구를 해야 한다. 감각 기관에 포착된 것들이 어떻게 해석되는지에 대해 꾸준하게 알아가야 하고, 공부해야 하고, 연구해야 한다.


훌륭한 연출가가 되고 싶은가?


그렇다면, 훌륭한 연출가들의 심상만 보지 말라. 그들의 내면에 있는 지각적 표상을 보라.


그리고 적어도 그만큼의 지각적 표상을 가지기 위해 공부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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