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트머스 회의(1): 폴라니의 역설(Polanyi's paradox)
1956년 5월 26일. 미국의 다트머스 대학교에서 '인간처럼 생각하는 기계'가 가능할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모였다. 총 32명. 대부분 대학 교수들이다. 서로에 대한 소문은 듣고 있었지만, 한 자리에 모이긴 처음이었다. 좋은 소문은 아니었다. 대부분 각자의 생활 반경에서 얼마나 왕따를 당하고 있는지, 얼마나 미친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는지에 대한 것들이었다. 그랬다. 1956년 당시 인간처럼 생각하는 기계를 말하는 사람들은 왕따였다. 당시 상식으로 이들은 정신 나간 사람이었고, 비난 받아 마땅한 이상주의자들이었다.
생각해보라. 이렇게 자신들의 생활 환경에서 투명인간 취급을 받고, 멸시 받고, 고통 당하던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 누구도 '인간처럼 생각하는 기계'에 대해 의심하지 않는다. 그런 것이 가능하다고 말하고, 가능하다고 믿고, 어떻게 해야 이런 일이 더 앞당겨질지 진지하게 이야기 한다.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을 것이다. 그 누구도 자기 얘기에 귀를 기울여 주지 않았는데, 여기서는 무슨 이야기를 하던 다 들어준다. 고개를 끄덕거린다. 더 건설적인 대안은 없는지 토론하자고 한다. 뭔가 인정받는 느낌이 들고, 이제야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든다. 움추러들었던, 자존감이 회복하고, 뭔가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다고 느껴진다.
이들이 얼마나 기분이 좋았는지는 이들이 회의를 한 기간에 잘 나타나 있다. 본래 3박 4일 정도로 예정되어 있었던 회의였는데, 너무 기분이 좋은 나머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회의를 이어간다. 회의 방식도 정형화된 방식, 그러니까 발제자가 있고, 발제가 끝나면, 토의를 하는 것에서 무제한 자유토론으로 바꾼다. 시간, 장소 모두 무제한이다. 화장실에서 볼 일을 보면서도 옆 칸에 있는 사람도 토론을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회의를 이어가면서 3개월을 회의를 한다. 후원해주는 사람도 없었기에 먹고 자는 것을 모두 자비로 해결해야 했지만,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생각을 공유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이 너무 행복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다트머스 회의(Dartmouth workshop)'다.
생각해보라. 5월 말. 즉 기말고사 기간에 회의를 시작했는데, 8월 말이 되었다. 그리고 9월을 앞두고 있다. 새학기 개강인 것이다. 각지에 있는 학교에서 다트머스 대학으로 전화가 걸려오기 시작한다. 전화를 받은 교수들은 불길한 내용 혹은 매우 격앙된 음성을 듣게 된다. '다음주까지 학교에 돌아오지 않으면, 자넨 해고일세!'
자신들이 너무 오래 회의를 했음을 깨달은 교수들은 부랴부랴 짐을 싸기 시작한다. 그러다 문득 3개월 간 회의한 것에 대한 총 정리는 해야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그렇게 마지막 회의를 위해 모인다. 역사에 남을 결론 세 가지를 도출하고 아쉬운 작별 인사를 나눈다.
첫째, 인간처럼 생각하는 기계 아직은 못 만든다.
3개월이나 회의한 것 치고는 다소 허무할 수 있는 결론이지만, 사실이다. 그리고 1956년 당시 이걸 깨달았다는 것만해도 매우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이 단순해보이는 결론 안에는 사실 인간에 대한 심오한 이해가 숨어있다. 후에 폴라니라는 학자가 1966년에 출간된 그의 책 『암묵적 차원(The Tacit Dimension)』에서 말한 것으로 알려졌지만[1], 사실 이보다 10년 앞선 다트머스 회의에서 다루어졌던 내용이다:
인간은 말할 수 있는 보더 더 많이 알고 있다.
We can know more than we can tell.
현재 폴라니의 역설(Polanyi's paradox)이라고 불리고 있는 이 문장은 과거에도 유효했고, 현재도 유효하고, 미래에도 유효할 진리다. 해설하자면 이렇다.
'인간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지식도 가지고 있지만,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인간은 말로 표현하는 것이 불가능하거나, 말로 표현하는 것만으로는 불완전한 지식들도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암묵적 지식(비언어적 지식)의 영역이 언어적 지식(선언적 지식)의 영역보다 훨씬 넓다.'
이것은 여전히 인간처럼 생각하는 기계를 만드는 것에 있어 큰 걸림돌 중 하나다. 인간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고 의사결정 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지식, 더 정확하게는 인간의 기억과 그것의 사용 과정에 대해 기계에게 설명을 해주어야 하는데, 언어적으로 설명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이다. 기계에게 축구를 어떻게 언어로만 설명해줄 수 있을까? 축구를 말로 설명해서 과연 메시같은 로봇 축구 선수가 나올 수 있을까? 말로 설명을 잘해주면, 호날두 같은 로봇 축구선수, 이강인 손흥민, 박지성, 차범근 같은 축구 선수 나올 수 있는 건가? 아니다. 축구는 말로 설명하는 것에 무리가 있다. 물론 일부 언어를 사용하긴 하겠지만, 축구는 해야 하는 것이지 말하는 것이 아니다.
피겨 스케이팅도 마찬가지다. 기계에게 말로 피겨를 설명하면 김연아 같은 로봇 피겨 선수 나오는 건가? 글세. 이 문제가 간단하지 않음을 다음의 예에서도 잘 드러난다. 인간처럼 생각하는 기계는 둘째치고, 모기처럼 생각하는 기계, 파리처럼 생각하는 기계, 잠자리처럼 생각하는 기계, 개처럼 생각하는 기계, 고양이처럼 생각하는 기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설명해야 한다. 그런데 사실 이게 정말 어려운 일이다. 기계에서 영상을 보여주고, 수천억개의 사진을 보여줘도 제대로 못한다. 빅데이터가 궁극적 해결책이 아니라는 소리다[2]. 모기처럼 생각하는 기계도 못만들고 있는데, 인간처럼 생각하는 기계라니. 정말 웃기는 얘기다. 현재 기술로는, 그리고 앞으로도 인간처럼 생각하는 기계는 쉽지 않다.
*다음 편에서는 다트머스 회의 두 번째 결론과 세 번째 결론에 대해 다룹니다.
[1] Polanyi, M. (2009). The tacit dimension. Chicago, Illinois, US: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 LeCun, Y., Bengio, Y., & Hinton, G. (2015). Deep learning. Nature, 521(7553), 436-4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