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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우 Oct 06. 2022

5. 나 내일 천왕봉 안 갈 거에요.

지리산 길 위 학교 에피소드 5

  현태는 새로 산 운동화 발볼이 안 맞아 뒤꿈치 부분을 접어 신고 걷는다. 발볼이 넓은데 매장 점원이 발가락 끝부분만 눌러보고 등산 양말 신고 신어도 충분하다고 했단다. 아니, 자기 발볼이 넓으면 그에 맞는 걸 사야지 매장 점원이 크다 했다고 그냥 사 오나. 한심하기 짝이 없다. 제대로 맞는 신발을 사 신지 않아 발 아프다고 속도를 못 내는 현태에 대한 못마땅함이 올라왔다. 등산화 신고 오래 걸은 뒤 도착해서 슬리퍼로 갈아 신는 습관이 있어 가방에 챙겨둔 내 슬리퍼를 꺼내 주었다. 


  “현태야! 그렇게 신고는 못 걸어. 운동화도 망가지고. 슬리퍼 빌려줄 테니까 이거 신어.”

  “오! 이거 엄청 편한 대요. 역시 슬리퍼가 최고야. 감사합니다.


  발에 맞지 않는 운동화 때문에 낑낑거리던 현태는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다만 내일 천왕봉 오를 때 슬리퍼를 신고 갈 수는 없지 않은가. 지원팀에 연락했다. 우리의 해결사, 구세주, 지원팀! 사랑해요. 지원팀이 중간에 만나 현태를 태워갔다. 등산용품 할인매장에서 천왕봉 등정이 가능한 등산화, 발볼이 아주 넉넉한 걸로 구입하고,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오들오들 떠는 아이들을 위해 경량 패딩과 기모 등산바지를 구매했다.  

  현태가 빠진 뒤, 재욱 선생님과 경석이와 나는 속도를 높였다. 이게 진정한 에이스들의 진군인가. 발걸음이 착착 맞아도 너무 잘 맞았다. 제법 속도를 올렸지만, 경석이는 묵묵히 걸었다. 불평이나 뒤처짐 없이 자신의 걸음을 내디뎠다. 그렇게 지리산 둘레길 2코스 운봉-인왕 구간을 마치고 지원팀의 차량으로 이동하여 내일 천왕봉 등정을 위해 백무동 느티나무 산장에 짐을 풀었다. 재욱 선생님과 현태, 나와 경석이가 한 조가 되어 어제처럼 방을 쓰기로 했다. 어제저녁 숙소에서의 좋은 기억과 오늘 무언가 해낸 것 같은 뿌듯함이 오늘 저녁 잘 쉬고 만반의 준비를 할 수 있겠다 싶었다. 숙소로 들어와 경석이가 혼잣말로 한 마디 한다. 


  “아씨? 왜 냉장고도 안 켜 놓은 거야?”

  “경석아! 냉장고에 뭐 넣을 거 있니? 물과 초코바 밖에 없는 거 같은데.”

  “아니. 이거 넣으려고 하는데 냉장고가 안 켜져 있잖아요.”

  “보통 펜션에서는 사람들이 자주 안 오면 냉장고 꺼 놓기도 해.”

  “우 씨! 존나 짜증 나.” 


  오 이럴 수가? 나의 기대는 무참히 깨어진다. 다시 호흡하고 가라앉히는데, 두 번째 한 방이 날아온다. 


  “선생님! 문 잠갔어요?”

  “어? 문? 아니.”

  “왜 안 잠가요? 들어오면 문부터 잠가야죠?”

  “아니 그게. 옆방에도 왔다 갔다 할 수 있고, 너 옷 산 것도 가지러 갈 거 아니야.”


  경석이는 계속 식식거린다. 나도 슬슬 달아오른다. 그래도 호흡! 호흡! 호흡! 겨우 한 숨 돌린다. 전화 한 통 하고 식탁에 앉는데, 세 번째 카운트 어택이 내 복부에 명중한다. 화장실에서 걸어 나오며 미간을 찡그리며 쏘아본다. 


  “선생님! 오줌 싸고 물 안 내렸어요?”

  이게 무슨 말인가. 어이가 없고 어안이 벙벙하다.

  “뭐? 물 안 내렸냐고? (나 화장실 간 적 없는데...)”


  당연히 입 밖으로 해야 할 말이 입 속에서 맴돌다 속으로 훅 사라진다. 미처 상황 파악도 안 되고 대처할 말도 생각나지 않는데 확신에 찬 공격이 쏟아져 들어온다. 혼잣말이라 하기에는 너무 크게 들리고, 들으라고 한 말이라기에는 다소 작은 목소리로. 


  “아니. 오줌 쌌으면 물을 내려야지. 사람이 기본이 안 됐어.”


  무언가 내 안에서 보호 시스템이 작동한다. 정신을 차리고 경석이를 똑바로 바라보며 단호히 말한다. 


  “너! 이리 와 앉아 봐.”

  “왜요? 난 할 말 없어요.”

  “내가 할 말 있으니까 이리 와 앉아.”

  “할 말 없는데 내가 왜 앉아요?”


  부글부글 화산이 끓어오른다. 마그마 폭발 직전이다. 목소리는 격양되어 떨리고, 흥분된 입술은 말도 살짝 더듬는다. 그래도 정신 차리고 할 말은 해야지. 식탁에서 벌떡 일어나 경석이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간다. 얼굴과 얼굴 사이는 30cm.


  “너! 내가 오줌 누는 거 봤어? 나 숙소 들어와서 화장실에 들어간 적도 없어. 무엇 때문에 그렇게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사실 확인도 없이 단정하고, 그걸로 사람 무시하듯 그렇게 말하는 거 아니야.”

  “아. 됐어요. 선생님하고 얘기하기 싫어요. 마음대로 하세요. 소리치고 싶으면 소리치세요. 나는 할 말 없어요.”


  사실이 아니라고 하는 말에 자신의 행동이 틀렸다는 걸 알아차린 건지, 내 단호하고 분명한 기세에 위축된 건지 모르지만 한 발 물러난다. 그러나 상대를 무시하고 궤변을 늘어놓으며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려 든다. 지리산을 누가 오자고 한 건지, 현태는 에이스도 아닌데 왜 자기한테 에이스 조라고 속였는지... 이런저런 다른 핑계로 핵심을 흩트리고 도망치려 한다. 나는 흥분했지만 이 순간이 자주 경험할 수 없는 아주 중요한 순간! 경석이의 내면과 연결되고 교류할 수 있는. 어찌 되었건 이 순간 적당히 타협하고 눈감아 지나가면 안 된다는 또렷한 의지! 치유와 성장으로 가는 중요한 길목에 서 있음을 알아차렸다.  


  “다른 이야기 그만하고, 지금 하는 얘기에 집중해. 네가 나한테 한 행동은 나를 무시하고 함부로 하는 태도야. 내가 화장실에 갔는지, 오줌을 쌌는지, 물을 내렸는지 넌 확인하려고 하지 않았어.”


  경석이는 대화에 집중하지 못하고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원망을 하며 분주하게 행동한다. 감정에 마주하지 못하고 사안에 직면하지 못한다.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사과하고 행동을 수정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것인가. 경석이가 살아온 시간들은 어떤 것일까. 자신의 실수에 대한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덮어 씌우고, 본질을 흩트려 상대가 제 풀에 지쳐 포기하게 만들어 상황을 무마하려는 태도. 나는 그동안 경석이가 사용해 왔던 방식대로 맞춰줄 마음이 전혀 없다. 그런 식으로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고 상황으로부터 도망쳐 자신을 보호하는 방식으로는 치유나 성장으로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아프고 힘들더라도 끝까지 직면하여 문제가 해결되는 긍정적 경험이 필요하다. 그런 면에서 나는 견고했다.  


  “너는 기분 좋으면 다가와서 살살거리고, 네가 원하는 대로 안 되면 기분 상해서 짜증내고 다른 사람한테 함부로 하고. 너가 에이스라고? 너가 무슨 에이스야? 쉼터에서 다른 선생님들도 너의 이런 성격을 언제까지 참아주고 기다려줘야 하는지 엄청 고민해. 다른 아이들이 네가 좋아서 너한테 맞춰 주는지 알아? 괜히 네 기분 상하면 불편하니까 맞춰주는 거야. 너 쉼터에서 마음 터놓고 진짜 친하게 지내는 선생님이나 친구 있어?”


  아플 걸 알면서도 나도 내 입술을 제어할 수 없었다. 평소 나 답지 않게 거침없이 단호하고 분명한 직언이다. 더 이상 숨을 곳 도망칠 곳 없다 느꼈는지 경석이의 최후 방어. 


  “나 내일 천왕봉 안 갈 거예요.”

  “그건 네가 선택해. 내일 우리는 천왕봉 올라가서 반대편으로 내려갈 거야.”

  “내가 알아서 대전 갈 거예요. 나 혼자 갈 수 있어요.”

  “내일 네가 어떻게 하든 그건 네 선택이야. 난 오늘 이 문제 그냥 안 넘어갈 거야. 저녁 먹고 와서 밤을 새더라도 너하고 끝까지 얘기할 거야.”

  경석이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딴청을 부린다.


  급한 전화가 있어 통화를 하고 식탁에 앉아 있는데 경석이가 다가온다. 갑자기 다정한 목소리로 걱정하듯 묻는다.


  “선생님! 어디 아프세요?”

  “아니. 오늘 이틀째 걷고 좀 피곤하기도 하고, 방금 전 너와 나눴던 대화에 대해 생각 좀 하느라고 그래.”

  “예? 저와 나눴던 대화요? 무슨 대화요? 전 기억이 하나도 안 나요. 방금 전 정신이 들고 보니까 선생님이 뭔가 피곤하거나 기분이 안 좋아 보여 걱정이 되어 물어본 거예요.”

  “헐! 너 진짜 기억이 하나도 안 나니?”

  “네. 무슨 일이 있었나요?”

  “만약 네 말이 사실이라면 네가 너한테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재욱 선생님과 현태가 저녁 먹으러 가자며 방문을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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