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처음 그림을 배우며 생소한 질문을 던지다
서양화 두 번째 수업에서 소묘를 시작했다. 처음 대상은 종이컵이었다. 하얀색 도화지에 연필로 종이컵 외곽선을 대충 그렸다. 그러고 나서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창에서 빛이 이 쪽으로 들어오니 여기는 환하게, 저기는 어둡게 명암을 줘야 합니다.”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내 눈에는 종이컵에 드리워진 빛과 어두운 부분이 보이지 않았다. 종이컵은 (무늬를 제외하면) 하얀색이었고 전부 환해 보였다. 그림 문외한 티 날까 봐 아무 소리 못했다.
종이컵 외면과 내면을 세 등분으로 나누어서 명암의 정도를 설명해주신 선생님 따라 부지런히 연필을 움직였다. 그리고 수십 번 종이컵을 들여다보았다.
‘나는 왜 이 상황이 황당할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어떻게 그려야 하나? 자신감 넘치는 붓질로 꽃과 나무를 생생하게 표현하는 다른 사람들도 이런 과정을 거쳤을까?’
눈에 보이는 대로 정확하게 잘 그리면 좋은 그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눈에 보이지 않는 빛과 어둠을 상상해서 그려야 할 줄 몰랐다. 아니면 내가 사물을 제대로 볼 줄 몰라서일까? (금방 깨달은 것처럼) 원래 그림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보인다고 상상해서 그리는 것일까? 나의 이런 의문은 이상한 걸까? 이상하든 어떠하든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은 있는 것일까?
나이가 지극한 회원님들은 손주 손녀 이야기 꽃을 피우고 시시콜콜한 농담에 하하호호 웃어가며 그림을 그렸다. 찬란한 자연경관이 담긴 사진을 옆에 두고 다양한 색을 섞고 크고 작은 붓을 바꾸었다. 사진과 동일한 형태이지만 사진과는 달랐다. 잘 찍어놓은 자연을 보는 것과 그 자연을 그린 그림을 보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세 단계 명암의 정도에 따라 가로와 세로를 번갈아서 열심히 그리고 보니 입체감이 나타났다. 연필로 종이컵 다운 그림을 그렸다. 그런데 또 질문, 원래 이렇게 막연한 상태에서 어디로 선을 그어야 할지 명확하지 않은 채 손을 움직여서 그림을 그려야 하는 것인지.
그림 그리기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고 싶어서 등록했던 서양화 수업은 자신감 있게 눈에 보이는 대로 잘 그리는 방법을 제대로 배우는지 알았지만 막연함 그 자체였다. 한두 번 수업에 괜한 예민함인가 싶기도 하다.
그림 그리기보다 그림을 보는 법, 사물을 관찰하는 법, 잘 모르지만 시도해보는 법, 그 과정에서 터져 나오는 질문을 응시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 종이컵을 그렇게 열심히 들여다본 적도 없고, 보이지 않는 세계를 그린다는 생각도 해본 적 없었다. 한 번 봤던 그림을 수십 번 처음 보는 것처럼 들여다 보려고 노력한 적도 없었다.
하얀 도화지를 응시하며 연필을 들고 이젤 앞에 앉지 않았으면 나오지 않았을 생소한 질문들이 앞으로 어떤 그림으로 그 답을 발견하게 될지 벌써부터 궁금하다. 그리고 더 이상 내가 그림을 잘 그릴 수 있을까? 그리지 못하면 어떻하나? 같은 질문이 사라져서 다행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