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세한 숨결이 책장에 내려앉는다. 빗자루를 들어 먼지를 턴다. 마른 기침에 먼지가 허공에서 춤춘다. 이호의 흔적이 지워지지 않았다. 도망칠수록 발목을 붙잡았다. 결국 항복하고 돌아왔으나 이미 집은 비었다. 편지더미는 두고, 책 한 권을 집어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호는 책을 좋아했다. 정확히는 글을 좋아했다. 옆 집 아주머니는 그가 쓴 일기를 읽는 취미가 있었다. 물론 이호의 허락이 떨어졌고, 일기보다 조금 더 정제된, 자서전처럼 보였다. 보통 자식을 둔 부모와 달리, 희수는 그의 아들에 대해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 비판은 물론, 자랑이 될 법한 그 어느 것도 떠벌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말수가 적은건 아니었다. 그의 대화 화제는 언제나 '좀 더 의미있는 삶을 살기 위한 방법들'에 가까웠다. 이호가 일기를 봐도 괜찮다고 말한 이유는 그런 희수의 성품에서 기인했을 터였다.
나는 온화하고 부드럽지만 어딘가 정제된 이 집안의 분위기가 어색했다. 나의 엄마는 늘 내 삶의 모든 문제에 관해 알고 싶어했고, 다른 곳에 공개하길 서슴치 않았다. 방에 노크도 없이 들어왔고, 당신의 방식과 틀을 강요했다. 그럼에도 나는 나의 엄마를 사랑한다. 엄마도, 나를 사랑한다.
이호가 내게 말은 건 날은 얼음장같이 추운 겨울이었다. 복숭아뼈 높이까지 쌓인 눈을 치우러 마당에 있던 거대한 빗자루를 들었다. 8살 아이에게 그것은 일이 아닌 하나의 놀이었다. 흰 도화지같은 길에 빗자루로 흙색을 채우는 행위. 몰두하며 흙색으로 사방팔방 채우다 보면 모르는 새 옆집 앞에 도착했다. 눈이 이토록 많이 내리는 날이 드물었기에, 한정된 기회를 남김없이 사용하겠다는 나름의 열정도 지니고 있었다.
"너.. 열심히 산다."
"재밌잖아. 집 안에만 있으면 답답하고."
"어차피 쓸어봤자 눈은 다 녹아버리잖아."
"난 물도 좋아해서 상관 없어."
아무 소용 없을 행위를 이토록 진지하게 반복하는 것에 대한 흥미였을지도 모른다. 이호는 그 후로도 눈이 오는 날이면 항상 앉아 있던 의자를 벗어나 집 앞으로 나왔다. 내가 눈을 쓸어내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리플레이 재생되는 카세트 테이프같아 보인다고 했다. 이호는 서너번 정도 나의 곁을 지켰고, 겨울의 끝자락 즈음 내게 집 안으로 들어오라 했다. 따듯한 유자차를 만들어 주었다. 호호 불어 한 입 맛본 뒤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어린이의 순진함과 곧 다닐 학교에 대한 기대감 따위의 이유로.
"이호는 학교에 왜 안가?"
"사정이 있어서."
"나는 원래 갔어야 하는데, 내년에 가야 한대."
"왜?"
"모르겠어. 부모님은 너무 빠를 필요 없대."
"...그래. 빨리 갈 필요는 없지."
"이호는 학교가 싫은거야?"
"싫진 않아. 의미를 못 두는 것 뿐이야."
"그렇구나."
열 두 살 이호의 피부는 훨씬 더 검게 탔다. 덩치도, 키도 많이 자랐다. 처음 봤을 때엔 그의 코 끝 부근에 나의 머리끝이 닿았다. 지금 그는 나보다 세 뼘 이상 컸다. 분명 남몰래 마법을 부리는 것 같다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도 했다. 사실 특수한 비밀조직에 소속되어 있다던지, 누군가에게 쫓겨 몸을 숨기는 중이라던지, 실은 초능력자인데 조용히 살기 위해 왔다던지. 그 때의 난 내 생일이 빠른인 줄 몰랐다. 그는 아마 알았을지도 모른다. 말은 걸지 않았어도, 나의 생일에 꼬박꼬박 편지와 사탕을 우편함에 둘 사람은 이호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