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여섯 시가 되기 전부터 배가 꾸륵거리기 시작했다. 아침을 거나하게 챙겨 먹는 편은 아니지만, 오이 하나 정도는 썰어 먹으려고 노력한다. 몸을 챙기자고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의미이기도 하고, 최근에는 극심한 스트레스까지 겹치면서 위 상태가 급격하게 나빠졌다.
오이를 먹었을 때 느끼는 포만감은 오래 가지 않는다. 그런데 그것도 습관이라고 안 먹으니까 배가 너무 고팠다.
어제 터미널 근처에서 먹었던 밥이 마지막이라는 사실을 떠올리자마자 배가 더 고파졌다. 예전엔 회관에 모여 식사를 함께 하는 일도 많았는데, 요즘은 아닌가? 회관 안 낡은 냉장고엔 맥주 세 캔과 막걸리 다섯 병뿐이다. 아침부터 빈속에 이걸 먹을 순 없었다.
시내로 나가서 끼니를 해결할 수도 있지만, 교통편이 시원찮으니 마을을 나가는 일부터 힘들었다. 게다가 돈도 없다. 안 오겠다는 택시 기사에게 저번처럼 값을 더블로 치르겠단 소리는 생각하지도 못할 정도였다.
어찌저찌 마을을 나간다고 해도 밥 먹고 나면 어떻게 돌아올 건가. 또 택시비를 더블로 치르겠다? 그럴 순 없다. 그럴 돈도 없고.
그렇다고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끼니를 구걸하고 싶진 않다. 여긴 유명한 관광지도 아니고, 애초에 사람 자체가 얼마 없는 지역이기 때문에 따로 음식을 파는 곳도 없다. 아니 예전엔 있었다. 사장 할머니가 찾아오는 손님이 밥 안 먹었으면 식사 대접하던 슈퍼. 마을 사람들은 이런 거 공짜로 먹을 수 없다며 할머니 손에 푼돈이라도 꼭 쥐여드렸다. 그 할머니도 아마 자식이 모셔갔을 거다. 아마 손주 결혼식 치르기 전에 서울에 모신다는 얘기를 한 거 같은데.
은근히 이런 것들이 기억에 남는다. 연못 마을에 대한 건 새까맣게 잊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았다. 지내는 사람이 나이 들었을 뿐, 거의 바뀐 게 없는 동네를 보면서 새삼스러운 것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완벽하게 잊은 게 아니라 단지 어둡게 가려놨을 뿐인걸까?
티브이라도 보려고 리모컨을 찾았지만, 나오는 채널은 거의 없었다. 화면이 보이면 잡음이 크고, 잡음이 없으면 화면이 잘 보이지 않았다.
노트북이라도 들고 올 걸 그랬나. 닳아서 잘 눌러지지 않는 리모컨 버튼을 꾹꾹 누르다가 결국 전원을 껐다. 그 사이 배는 요란하게 소리 내고 있었다. 그 슈퍼 할머니라도 계시면 좋은데.
어쩌면 그 할머니의 뒤를 이어서 다른 사람이 이웃들의 끼니를 챙겨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면서 굳이 찾고 싶진 않았다. 만약 그 사람이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혹은 내가 이미 연못 마을을 떠난 후에 온 사람이라면? 어쩌면 약은 사람이라서 내가 매일 끼니를 얻어먹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나에게만 돈을 더 받을지도 모른다.
미윤은 끝없이 꾸륵거리는 배를 문질렀다. 소파에 누울까. 뒤로 기대려고 하는데 갑자기 누군가 노크하는 소리가 들린다.
“미윤아, 있니?”
정확하게 말하면 발끝으로 조심스럽게 툭툭 차는 느낌이다. 누으려고 하다가 주섭주섬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얼른 회관 문을 열었다. 어색하게 웃으며 들어오는 사람은 영연이었다. 마을 이장인 희운과 결혼하면서 이 마을에 정착하게 된 아줌마.
“어머, 다행이다. 나는 또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애를 깨웠을까봐 걱정했는데.”
그런 말을 하는 사람치곤 양손이 무거웠다. 낮은 상 하나를 들고 있는데, 그 위에 덮인 얇은 가림막 사이로 온갖 반찬이 보인다. 맛있는 냄새도 솔솔 올라왔다.
회사 다닐 땐 이 시간에 일어났지만, 장사할 땐 이 시간보다 조금 늦게 일어났다. 그리고 아직도 장사할 때 패턴이 몸에 남아 있다. 즉 지금은 잠도 덜 깨고, 머리도 어지럽고, 피곤해야 말이 되는 상태라는 거다.
이상한 꿈 때문인지, 밤에 누가 찾아와서 그러는 건지 일찍 잠이 깨버렸기 때문에 지금은 멀쩡했다. 문제는 배꼽시계도 정확하다는 거다. 영연의 말에 대답하기 전에 배가 먼저 꾸르륵 울렸다.
코를 찌르는 청국장 냄새에 가림막 너머로 봐도 푹 잘 익은 배추김치. 이 두 가지만으로도 이미 혀 아래 가득 침이 고이는데, 일인 가구는 직접 만들어 먹기 어려운 나물 반찬을 시작으로 얼핏 봐도 그릇이 열댓 개는 된다.
예의상 뭘 이런 것까지 챙겨왔냐고 물어야 했는데. 눈치 없는 꼬르륵 소리에 영연은 미윤을 보며 한 번 웃고, 회관 안으로 들어왔다.
“안 그래도 신경 쓰여가지고... 여기까지 온 건 좋은데, 밥은 어떻게 먹냐는 생각 드니까 가만히 못 있겠더라고. 여기가 뭐, 식당이 있는 것도 아니고, 밖에 나가서 뭘 사 먹기가 편한 곳도 아니고. 잠들어 있으면 냉장고에 넣어두려고 했는데, 잘됐네. 따끈따끈할 때 먹자. 이리 와서 앉아.”
맛있는 냄새가 진동한다. 어색한 척 자리에 앉지만 배는 요동치고 있다. 아까처럼 밖으로 내보내는 소리를 내는 건 아니고 안에서만 부글부글 끓으니까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수저를 들어 청국장 먼저 떠먹었다. 이런 음식은 밖에서 사 먹지 않으면 먹기가 힘들다. 식구가 많은 것도 아니고, 며칠 내내 같은 음식만 먹는 것도 질리고, 게다가 냄새가 심해서 집에 스며들면 잘 빠지지도 않는다. 특히 요즘 같은 여름엔 에어컨 틀고 사니까 필터에서 청국장 냄새가 나기도 한다.
여긴 괜찮겠지. 여기도 에어컨을 켜고 살지만, 그래도 한낮이 아니면 땀이 줄줄 흐를 정도로 덥진 않다. 영연도 그 사실을 잘 아는지 미윤이 밥 먹기 시작하는 걸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덜 습한 바람이 불었다. 연못 방향이 아니라 반대 방향으로 바람이 불어주고 있었다.
영연의 음식은 간이 세지만, 너무 짜서 먹지 못할 정도의 수준은 아니었다. 예술인 건 예상대로 잘 익은 김치였는데, 도대체 어떻게 이런 맛이 나는지. 평생 김치만 담그고 사셨나?
나물 반찬도 오랜만에 먹으니까 맛있었다. 반찬 가게에서 파는 건 양이 애매해서 조금씩 먹자니 감질나고, 푹푹 퍼먹자니 먹을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고사리 나물은 산더미를 이룬 듯했지만, 몇 젓가락 푹푹 먹으면 없어지고 딱 만족스러울 만큼 배도 채우는 양이다.
잘 먹겠다는 말도 없이 냉큼 먹기부터 시작했으니, 음식을 기껏 가져온 입장에선 기분 나쁠지도 모른다. 다 먹고 인사하면 그만이다. 그래도 기분 안 좋아 보이면 설거지까지 해주면 된다.
자꾸만 힐끔거리며 바쁘게 움직이는 그의 눈동자를 단지 기분 나쁨으로 해석했다. 설마하니 별로 궁금하지도 않을 안부를 핑계로 이것저것 물어볼 줄이야.
“잘 지냈어?”
“네, 그럭저럭이요.”
“다행이다. 나는 네가... 네 소식이 영 들리지 않으니까 궁금하기도 하고 걱정하기도 하고.”
말하다가 잠깐 뜸 들인 부분이 혼자 마음에 걸렸는지, 어느 집에 누구는 도대체 마을을 나가서 사는 건지, 마을 안에서 사는 건지 구분 못할 정도로 자주 들락거린다는 쓸데없는 말이나 한다.
무심결에 죽은 부모 얘기를 꺼내려고 했겠지. 나는 내 부모의 시신을 발견한 이후 이 마을을 떠났지만, 이 마을 안에서 내 부모의 이야기는 한동안 입에 오르내렸을 거란 사실은 예상했다. 흔한 일도 아니고, 내 부모가 결혼했던 이유도 특이하긴 하니까.
그 일이 나에게 상처로 남았을 거라 생각하나본데, 상관 없었다. 상처도 아니지만 나서서 오해를 풀어주고 싶은 생각도 없다. 상처가 아니라고 하면 아니라고 하는 대로 또 입에 오르내릴 테니까.
내가 듣거나 말거나 혼자 중얼거리는 모습을 보며 쌀밥 위에 청국장에 든 두부를 수저 뒷면으로 꾹 눌러 으깼다. 어릴 땐 전혀 몰랐는데 어머니 말이 딱 맞았다. 하고 싶은 얘기가 있으면서 그걸 돌려서 말하는 법을 터득하지 못한 듯 자꾸 엉뚱한 말만 한다는 버릇.
어릴 때야 내가 인사하는 것 말곤 할 말이 뭐가 있었겠는가. 이제 보니까 어머니의 말뜻을 이해하겠다.
지금의 상황이 아닌 업무적으로 만나는 상황이었다면 지금쯤 머리끝까지 짜증이 치밀었을 거다. 도대체 말 한 마디 제대로 못하면서 뭘 하겠다는 건가? 가게 하면서 아르바이트생 구해보겠다고 면접 볼 때도 마찬가지였다. 뭐 하나 물어보면 대답하는데 세 시간씩 걸린다. 아주 속 터져 죽을 일이다.
지금은 그런 상황도 아니고, 배고픈데 밥이 들어가니까 사람 마음이 또 온순해진다. 그냥 눈앞에 있는 식탁이나 바라보며 밥을 먹었다. 강한 불에 후다닥 볶아서 졸아든 불고기는 먹으면 먹을수록 달았는데, 이상하게도 손이 계속 갔다.
혼자서 중얼거리고 있던 영연은 아무래도 민망했는지 물 한 잔 마시겠다며 회관 부엌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면서 은근히 나에게 물었다. 요즘 서울 집값은 어떠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