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by 이홍

다들 알고 있으면서도 눈치 보느라 말이 없다. 미윤은 자리에 앉으며 빨리 흩어지진 않겠구나 싶은 예감에 이마를 한 대 치고 싶은 심정이다.

이미 냉장고에서 맥주 한 캔을 꺼내 마신 석혁은 남들 눈치 보지 않고 크게 트림한다. 그러나 지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 그의 행동이 익숙하기 때문이 아니라 거기에 크게 관심을 두고 싶어 하지 않는 눈치다.

다들 알고 있는 거다. 입을 열면 분명 불편한 이야기가 시작될 것이란 사실을. 이럴 땐 보통 이장인 희운이 나서서 회의를 이끌어가곤 했는데, 지금은 입에 돌이라도 물었는지 조용하다.

서울 여자들이 와서 집 파는 문제를 생각해봤단 사실을 알렸으니,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차마 꺼내지 못할 거다.

에어컨에서 나오는 차가운 공기가 어느 정도 주변을 시원하게 만든다. 끊임없이 자기 얘기만 하던 현은마저도 입을 다물자 시원한 회관 안이 숨 막히도록 답답하게 변한다.

이럴 거면 뭐하러 모였을까. 나눠야 하는 이야기는 빨리 나누고, 조정해야 하는 사안은 조정하고, 얼른 집으로 돌아가면 될 걸.

이른 시간임에도 졸린 기색이 없는 걸 보면 다들 잠 때문에 힘든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데. 차라리 내가 입을 열까? 그러고 싶지만 미윤은 제대로 아는 게 없다. 몇 안 되는 마을 사람들을 만나면서 연못 마을을 없애고 도로를 만드는 일에 대해 어떤 생각인지 알곤 있지만, 나한테 솔직하게 말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이 마을을 떠난 뒤, 시간이 제법 흘렀음에도 아직도 외부인이니 뭐니 타령하고 있는 거 보면 말 한 마디 꺼냈다가 열 마디로 욕을 들을 가능성이 있다. 나도 집 팔고 싶어서 안달난 사람이라고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도 보이고.

일 분이 꼭 일 년처럼 흐른다. 그렇게 오 년 정도 흘려보냈을 때, 회관 문이 열리고 현정이 혼자 들어온다.

다들 약속이라도 한 듯 그를 쳐다본다. 그는 갑작스럽게 몰리는 시선에 놀라지 않는다.

“어르신은?”

곧장 날아가는 건 현은의 날카로운 목소리다.

“지금 주무시고 계세요.”

“그래서 혼자 왔어?”

“네.”

“어르신이 깨셔서 찾으면 어쩌려고?”

“당분간은 안 깨실 거니까 괜찮아요.”

“그걸 어떻게 알아?”

말꼬리를 잡고 질질 늘어지는 게 옆에서 들어도 짜증나는데, 현정은 그런 상황이 익숙한 듯 대답 없이 자리에 앉는다. 그렇다고 해서 입을 다물 현은이 아니다.

“요즘 너무 티내는 거 아니야?”

“뭘요.”

“이거 봐, 어른이 얘기하는데 말도 짧아가지고. 점점 건방져지고 있어. 특히 그 서울 여자들이 와서 도로니 뭐니 그딴 소리할 때부터 저런 거 같아, 아주.”

“......”

“어르신 제대로 돌보기는 하는 거니? 아무리 남이라고 해도 그렇지. 아니, 같이 살 부대끼고 사는데 가족보다 더 가까워야 하는 거 아니니? 어쩜 저렇게 인정머리가 없어?”

“그럼 어떡해요? 주무시는 어르신 깨워서 여기까지 모시고 올 수도 없고, 저라도 회의에 참석해야 어르신께 전해드리죠.”

“따박따박 말대꾸까지 하네?”

솔직히 현은과 현정의 나이 차이는 그렇게 크지 않다. 꼭 존중해야 하고, 대접해야 할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덜할수록 더하다고 하지 않던가. 무슨 말만 하면 나이 잡고 늘어지는 건 다른 사람에게도 다 똑같은 모양이다.

가만히 앉아 있던 정현이 희운을 힐끔거리는 걸 보니 이런 갈등은 자주 일어났고, 대부분 희운이 말렸나보다.

하지만 오늘은 입을 꾹 다물고 기분 나쁘다는 티를 팍팍 내고 있으니 큰 싸움 나지 않게 말려보라고 옆구리 찌르는 사람도 없다. 예측하기로 그 역할은 항상 현은이 했을 거다. 시끄러우니까 싸움나지 않게 말려야지, 이장이 뭘 하고 있냐고.

이건 싸운다고 하기보단 현은이 일방적으로 시비 거는 것에 가깝지만.

“그만 하세요.”

보다 못해 나선 건 영연이다. 평소 남편이 하는 일을 대신 맡아서 해야 한다는 게 짜증나서 미치겠다는 말투다. 희운은 아내가 있는 쪽을 쳐다보지도 않는다.

“싸움이나 하려고 모인 거 아니잖아요.”

“싸움이나?”

“마을 없애는 문제나 얘기하자고요.”

“허.”

헛웃음을 터트린 현은이 뭐라고 한 마디 하려는 듯 나선다. 그러나 말리는 사람이 없자 내가 이번엔 특별히 봐준다는 식으로 자리에 앉는다. 그 모습이 어이없었지만, 미윤은 부추기지 않기로 했다. 얼른 회의하고 다들 회관을 나가는 것, 미윤이 가장 원하고 있는 게 그것이기 때문이다.

회의는 곧바로 시작된다. 어떻게 진행된다는 안내도 없이 그냥 각자 하고 싶은 말을 하는가보다.

그러나 방금 전 싸움(을 가장한 일방적 시비)이 무색하게도 다시 침묵이 돈다. 누구 하나 쉽게 입을 열지 않는다.

그러는 와중에 트림을 연속 세 번한 석혁이 말한다. 술에 취해서 그런 건지, 원래 그런 건지 꼬부랑거리는 말투를 알아듣기 힘들다.

“우리 애들은 빨리 털어버리라는데.”

“뭐를요? 집을?”

도대체 그게 말이 되냐는 듯 눈을 크게 치켜뜬 현은이 날카롭게 쏘아붙인다.

“아, 지들이 나를 모시겠다고 하는데 어떡해. 혼자 사는 것도 예전에나 좋았지, 나이 드니까 힘들어. 잠깐 움직이는 것도 고되고. 이러다가 뭔 사고라도 나면 내 몸뚱이 다 썩고 나서 발견되는 거 아닌가 몰라.”

“우리 연못 마을 사람들이 얼마나 챙겨주는지 알면서 그런 말을 해요?”

“챙겨주기는. 내가 너랑 얼굴 마주 본 게 얼마 만인지 알어? 여편네들이나 모여서 조금 떠들고 말지, 나한테는 오지도 않어. 이러고 사느니 그냥 집 팔고 애들한테 기대 사는 게 나은 거지.”

석혁은 현은에게 손가락질 한다. 방금 전까지 어른한테 건방지다며 현정을 탓하던 현은은 임순희 어르신 다음으로 나이가 많은 석혁에게 성질부린다. 얼굴 마주한 게 얼마 만이냐고 물으니 현은은 대차게 소리친다.

“그걸 말이라고 해요? 아저씨 정신 차리세요. 고작 그런 이유로 고향을 버리겠다고요?”

“너는 돈도 많아서 사람들이 잘 보이겠다고 손바닥 비벼대는지 몰라도 나처럼 돈 없고 술만 먹는 사람한테는 아무도 없어. 내가 언제 어디서 죽을지 모르는데, 가기 전에 내새끼 얼굴이라도 보고 가야지.”

딱히 맞는 말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게, 석혁은 육아에 그렇게 협조적이지 않았다. 미윤이 기억하고 있는 석혁의 자식들 또한 자신들의 아버지를 그렇게 챙기는 편은 아니었다.

엄청난 보상금 이야기를 들었으니 그 돈에 눈이 멀어 꼬시는 거겠지. 수도권에 널린 게 요양원이다. 적당히 돈 받아내고 요양원에 넣으면 그만인 거다.

“아저씨, 걔들이 아저씨를 정말 돌볼 거 같아요? 그거 그냥 돈만 받고 싶어서 수작 부리는 거라고요. 그걸 몰라요? 보상금 받으면 그거 꿀꺽하고 아저씨 요양원에 집어 넣을 걸요? 거기서 죽어도 찾아오지도 않을 텐데.”

나는 생각만 하고 있었지만, 현은은 그걸 직접 입으로 뱉는다. 석혁은 인상을 찌푸리지만 거기에 대한 답을 하지 않는다. 입 다물고 무시하는 게 나을 거라는 판단을 한 거다.

뭐라고 말해봤자 돌아올 말이 곱지 않을 걸 아는 듯하기도 하고, 현은이 입으로 말한 것들을 이미 다 알고 있는 듯하기도 하다.

어쨌거나 두 사람이 말하기 시작하면서 너도 나도 한 마디씩 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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