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는 실패로 치부할 수 있을까. 본인의 의지와는 별개로 발생하는 화재, 재난, 기상악화 같은 애초부터 선택이나 행위의 결정이 없는 것이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자발적인 결심과 상관없이 세상에 태어나 하나의 이름을 갖고 생을 살다가 끝내는 죽음이다. 그렇다면 사람은 왜 이름을 짓고 부를까? 그리고 사람만이 시와 편지 같은 글을 짓는다. 나 역시 끊임없이 이름을 썼다 지우면서 많은 이들을 추모했다.
러시아의 시인인 알렉산데르 푸시킨의 시처럼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현재는 슬픈 것“ 나의 과거는 우울하기 짝이 없었다. 마치 비 갠 거리에 버려진 우산처럼 공허한 마음이었다. 나의 서른은 유난스러울 만큼 슬펐고 되는 일은 없고 삶을 자주 비관했다. 상실, 우울, 방황 그 폭풍우 속에서 홀로 망망대해에 있던 길고도 외로웠던 시간들.
푸시킨 역시 굴곡의 삶을 살았는데 그는 아내 나탈리야와의 불화와 갈등 속에서 고통을 받았다. 후에 아내와 밀회를 나누던 조르주 단테스 장교와의 결투에서 중상까지 입었으니까. 그러고는 사경을 헤매다가 4일 후에 푸시킨은 결국 사망하게 된다. 하지만 그는 아내 나탈리야를 뮤즈로 삼을 만큼 평생을 사랑했고 마지막 순간에도 몇 번이나 나탈리야의 이름을 부르면서 그녀에겐 아무 잘 못이 없으며 항상 그녀를 믿었다고 되풀이했다고 한다.
그처럼 한 사람에게 다른 한 사람의 존재는 전부이자 세계일 수 있다. 그렇다고 믿었던 순간이 내게도 있었다. 서른이 훌쩍 지난 지금은 굳이 부정하지도 않고 긍정하지도 않겠다. 다만, 서른 중반에 다다르면 여러 가지 요령이 생긴다. 한 가지 예로 ‘고독을 자처한 사람이 외로움을 즐길 수 있다’라는 나름의 방법이다. 어쩌면 자기 합리화일 수도 있겠다(아니면 노화 현상과 함께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귀차니즘 같은) 그때는 몰랐었다. 영원할 것 같았던 젊음도, 사람도, 사랑도 그 당시에는 벅차고 숨차고 어지러웠다. 그리고 모든 게 실패의 연속이었던 서른 즈음에는 칠흑 같은 어둠보다 혼자인 자신이 더 두려웠다.
(그림, 알렉산드르 푸시킨 초상화 182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