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난
오전부터 카페에 가 책을 읽었다.
그동안 읽지 못했던 책을 마저 읽고 중국어 책도 펼쳤다. 오전에 카페에서 시간을 보낸 뒤 가고 싶었던 곳 중 걸어서 갈 수 있는 곳을 가보기로 했다. 블루프린트 창의 문화공원을 목적지로 걷기 시작했다. 바로 앞에 미츠코시 백화점이 있어 거기도 들려보기로 하고.
가다 보니 백화점에 먼저 도착해서 잠시 들어갔다 나왔다. 역시 백화점은 내 기준, 재미있는 게 없다. 어딜 가나 비슷비슷한 느낌이라. 대충 눈으로 훑고 후다닥 나와 맞은편 문화공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런데 너무 이른 시각에 온 건지 상점들 반은 문이 닫혀있다. 도착한 시간은 12시쯤. 가게에 적어놓은 영업시간을 보니 1시부터인 곳이 많았다. 아무리 시간을 때워도 여기서 1시간을 보내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블루프린트 창의 문화공원은 작은 소품샵들이 몰려있는 곳이었다. 쇼핑을 즐기는 편이 아니라 상점이 문을 연다 해도 구경하며 그리 재미있을 것 같지는 않아 문을 연 가게들을 한 번씩 돌고 나왔다.
언젠가부터인지 물욕이 없어졌다. 이제 사는 게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보관하느냐가 문제다. 뭔가를 사고 싶어도 '어떻게 보관할 건데?'라는 물음에 사고 싶은 마음이 싹 날아간다. 대신 돈 욕심은 있다. 많다. 귀찮은 일을 해결해 주는 건 돈 밖에 없으니까. 시간을 살 수 있는 유일한 재화는 돈뿐이다. 지금 내가 가지고 싶은 것은 시간뿐인 듯하다.
구경 후 커피를 한잔 사서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오늘은 이상하게 기분이 축축 처지는 날이다. 숙소 로비에 앉아 중국어 책을 마저 봤다. 밖에서는 숙소 바로 앞 가게 아저씨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아, 알아듣고 싶다. 빠르게 지나가는 말 중 하나라도 잡을 수 있었으면. 흩어지는 낱말 하나하나가 아쉽다. 안 쓰던 머리를 써서 그런지 배가 꼬르륵거린다. 책을 방에 놓고 밥을 먹으러 나갔다.
현지 느낌 물씬 나는 노상 식당에서 사진을 보여주며 밥을 시켰다. 주인아저씨가 새우와 고기 다진 것을 들어 보이며 섞냐는 제스처를 했다. 고개를 저었다. 새우만 손으로 가리켰다. 새우만 주세요! 아저씨가 고개를 끄덕이신다.
커다란 웍에 휙휙 볶은 밥이 금방 테이블에 올라왔다. 한입 먹으니 동네 중국집에서 시켜 먹은 볶음밥 맛이 난다. 별거 없는데 너무 맛있다. 밥은 꼬들꼬들하고 간은 딱 알맞다. 한 그릇을 뚝딱 비웠다. 가격은 85위안. 우리나라 돈으로 3700원 정도다.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치고 근처 공원에 들렀다. 그런데 분위기가 좀 이상하다. 월요일이라 그런지 공원에 젊은 사람은 없고 대부분 할머니, 할아버지들이신데 뭔가 이 공원에 사시는 분들 같다. 잠시 구경하다가 금방 자리를 떴다.
다음 목적지는 오원과 츠칸러우다.
위의 정문을 돌아가면 뒤편에 저런 연못이 나온다. 천천히 둘러보아도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 관광객은 나뿐이었고 운동하러 나오신 현지분들이 몇 분, 연못 앞에서 콘셉트사진(?)을 찍는 사진사와 모델 그리고 잉어 밥 주는 어린 친구 한 명이 다였다.
오원을 거쳐 이번에는 츠칸러우로 향했다. 가는 길에 신기한 곳을 발견했는데, 오원 바로 앞에 위치한 가게가 그것이다.
처음에는 소품샵인 줄 알고 들어가 보려 했는데, 무엇을 파는 곳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안을 살펴보니 파마를 하고 있는 손님이 보였다. 그리고 옆에는 커트를 하고 있는 손님. 미용실이었다. 무턱대고 들어갔으면 서로 뻘쭘한 상황이 될 뻔했다. 겉은 해리포터에 나올 법한 신비로운 분위기를 폴폴 풍기고 있었는데 미용실이라니. 이런 곳에서 머리를 하면 더 예쁘게 될 것 같은 느낌이 들긴 했다.
츠칸러우는 오원에서 걸어서 10분 정도의 거리에 있었다. 어느새 거리가 조금씩 어두워지려고 하고 있어 조금 빨리 걸었다. 츠칸러우는 표를 사야 하는 곳이었다. 입장료는 70위안. 밖에서도 볼 수 있기는 하지만 들어가 보지 않으면 아쉬울 것 같아 표를 사 입장하기로 했다. 내가 도착한 시간이 이미 6시가 가까워지고 있는 시간이라 금방 문을 닫는 게 아닌가 걱정했는데, 운영 시간이 오후 9시까지라 한시름 놨다.
들어와 보길 잘했다. 개인적으로는 굉장히 마음에 드는 곳이었다. 마음이 고요해지는 느낌. 사실 옆에도 건물이 하나 더 있는데, 거긴 보수 공사 중인 듯했다. 그래서 결국 볼거리는 저 누각 하나다. 금방 둘러보면 몇 분만에도 끝이날만큼 작은 공간이었는데, 이상하게 이곳이 좋았다. 밖은 오토바이와 차가 쌩쌩 달리는데 이곳은 고요했다. 보이지 않는 경계선이 둘려져 있는 듯했다.
그렇게 잠시나마 고요한 시간을 보내고 다시 배꼽시계가 울려 다리를 움직였다. 오늘 저녁은 우육면이다. 대만에 도착해서 처음 먹는 우육면. 구글에서 근처 우육면 집을 찾았다. 평점이 가장 좋은 곳으로 가기로 한다. 평점 4.9점에 거리도 괜찮다. 걸어서 10분 이내. 마감이 7시 30분이란다. 빠르게 걸었다.
우육면과 데친 야채 하나를 시켰다. 우육면은 국물이 진한 것이 보양식을 먹는 느낌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저 야채볶음이 아주 맛있었다. 혼자 여행을 하다 보니 사람이 너무 많은 곳은 혼자 먹기 눈치가 보이는데, 여기는 혼밥 하기 딱 좋은 식당이었다. 웨이팅도 없었고(다행히) 사장님도 매우 친절하셨다. 한국인인걸 어떻게 눈치채셨는지 음식을 가져다주시면서 한국말로 '맛있게 드세요'라며 말을 건네주셨다. 따뜻한 마음에 괜히 감동받아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는 말을 연신했다.
그렇게 만족스러운 저녁 식사까지 마치고 숙소로 걷다가 괜히 돌아가기 아쉬워 주변 강을 한 바퀴 돌았다. 운치가 있었지만 오늘따라 바람이 많이 불어 살짝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있었다. 후다닥 숙소로 돌아왔다.
그러고보니 오늘은 하루종일 걸어만 다녔다. 그래서인지 발이 아파온다. 어서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워야겠다. 뜨끈한 샤워 생각이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