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제작가와 일러스트레이터 부부의 미국 유학기
아내' 김재이
-폭우
미국행에 오르기 전 제주를 떠나 일산 친정집에 며칠 머물게 되었다. 그런데 그날만 해도 화창했던 날씨가 이튿날부터 전국적으로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하며 단 하루 만에 막대한 피해가 속출했다는 뉴스가 여기저기에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안타까운 뉴스를 뒤로하고 17년 7월 25일, 꼬박 하루를 비행해서 미네소타의 메인 시티인 미네아폴리스 공항에 드디어 도착했다. 그런데 우리는 그곳 미국에서의 첫발을 내딛는 순간 믿기지 않게도 한국과의 연장선인 듯 또다시 난폭스러운 폭우와 그대로 마주해야 하는 난처한 상황과 맞닥뜨려야 했다. 렌터카를 빌려 폭우 속을 얼마나 달렸을까. 미국 전화기에서 첫 벨소리가 요란스럽게 울려댄다. 한국에서 미리 계약해둔 집주인이었다. 남편은 간단한 인사를 나누는 듯하더니 이내 표정이 어두워졌고 그 모습을 지켜보는 내 가슴이 덩달아 불안함으로 요동치기 시작했다. 입주할 집에 작은 문제가 생겼다는 이야기로 대화가 시작되었지만 미국인과의 첫 통화여서인지 아직 영어가 서투른 남편은 더 이상의 긴 대화가 불가능한듯 보였다. 어찌 된 상황인지 몹시 궁금하고 걱정되었으나 일단 가고 있으니 만나서 이야기하자며 전화를 끊고 가던 길을 재촉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우리는 문득 잊고 지냈던 6년 전 제주살이를 처음 시작할 때의 일이 불안스럽게 스멀거리며 떠오르기 시작했다. 당시 오래된 농가주택이었던 제주집의 지붕을 통째로 교체하는 대 공사를 하겠다고 집 뚜껑 다 철거한 상태에서 당일 공사팀이 연락 두절 후 사장까지 잠적하는 황당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었다. 그날 밤 제주에는 60년 만이라는 기록적인 폭우가 미친 듯이 쏟아져 내렸고 졸지에 수재민이 되어버리고 말았던 그 악몽들이 말이다. 설마 그런 일은 아니겠지. 그 생각에까지 미치자 남편도 나도 동시에 절로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었다. 우리는 차를 달리는 동안 무슨 말이라도 한마디 잘못하면 혹여 부정이라도 탈까 봐 집까지 다다르는 동안 서로 단 한마디 말도 없이 차 안은 팽팽한 침묵만이 고요히 흐를 뿐이었다.
집 앞에 도착하자 덩치가 큰 은발의 집주인 남자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와 우리 둘은 어색한 악수를 나누었다. 그의 안내를 받으며 집안으로 들어서자 내심 불안했던 대로 매캐한 냄새가 먼저 코를 찔렀다. 방방마다 카펫이 모두 까 뒤집어져 있었고 카펫 밑의 단열 스펀지와 카펫은 물에 퉁퉁 불어 원래 두께의 두 세배는 부풀어진 듯 보였다. 망연자실하며 엉망인 집안꼴을 그저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는 우리를 보며 궁여지책 집주인의 변명은 이러했다. 예고에 없던 폭우로 창문 단속을 제대로 하지 못해 많은 양의 비가 밤새 집안으로 들이닥쳤으나 곧 클린 센터가 도착해서 모두 원상복구 시켜줄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더불어 이 지역에서 그런 기록적인 폭우는 절대로 흔한 일이 아니니 더 이상 걱정은 하지 말라는 애향심이 묻어나는 애틋한 조언까지. 그러나 와이? 도대체 왜? 매번 절대로 흔하지 않다는 그 기록적인 폭우들은 왜 그리도 우리들의 머리 위를 끊임없이 따라붙는 걸까라는 의구심만은 결코 지울 수가 없었다.
남편' 장기주
-아내의 바디랭귀지
미국을 향하는 기내에서는 공항 입국심사가 걱정이었다면 막상 미국 땅을 밟고 나니 이제는 그보다 십 수배는 많은 생활과 관련된 일들이 홍수처럼 내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공항을 나오자마자 내 눈높이의 영어 수준으로 말해주는 사람들은 어느새 모두 사라져 버리고 아무리 들어도 잘 들리지 않던 할리우드 영화 속 대사처럼 빠른 리플레이 수준의 영어들이 속절없이 허공으로 사라져 버리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신기한 일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아내의 영어 회화 실력이었다. 내가 미국인들과 어떠한 대화를 나눌 때마다 아내는 하나라도 놓칠까 뚫어져라 우리들의 대화를 경청하고는 했다. 그러다 잠시라도 내가 그들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 생길라치면 불쑥불쑥 치고 들어와 통역을 능숙하게 해내는 게 아니던가. 하지만 아내는 미국에서 고작 2년 살겠다고 영어공부까지 하고 싶지는 않다고 단어책 한번 들여다보지 않은 영어 무식자였다. 그러니 그런 상황이 신기하기만 한 나는 나중에라도 어떻게 알아들었냐고 물으면 거만하기 짝이 없는 그녀의 표정과 설명이 더 가관이다.
‘그 사람이 한 말들 중 알아들은 단어는 딱 두 개, 그 두 가지 단어와 그의 표정으로 그 상황과 대답을 유추해 보았다고나 할까? 정황상 나는 딱 들리던데! 자기는 그게 안 들려?’
기가 찰 노릇이었다.
또 어느 때엔가는 살림을 장만하러 집 근처 월마트에 갔던 날이 있었는데 비누를 쉬이 찾지 못하고 헤매는 날이었다. 그때 저 멀리서 겨우 직원 한 명을 발견했는데 성격 급한 아내가 잠시 이곳이 미국인 것을 잊은 듯 카트를 밀고 있던 나를 제치고 용감하게 그 직원에게 먼저 달려가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코너를 돌아 빠른 걸음으로 이내 사라져 버린 아내 뒤를 쫓으며 그러나 마나 영어 한마디도 못하고 뻘쭘하게 나를 기다리고 있겠지라고 생각했지만 코너를 돌아서자 그것은 내 오산이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아내는 멀리서 보아도 ‘아이, 원트, 솝’이라고 부담스러울 정도로 또박 또박한 발음의 영어로 마트 직원에게 질문을 하고 있던 참인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직원은 아내의 발음을 젼혀 못 알아듣는 듯 난처해하는 표정이 역력해 보였다. 그러자 곧 비장한 표정이 된 아내가 과한 동작을 더하여 손으로 비누칠과 세수를 하는 바디랭귀지를 리얼하게 표현하는 것이었다. 순간, 매대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내 얼굴과 귓불이 발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하며 왠지 더 이상 그들의 곁으로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았다. 그나마 다행으로 아내의 바디랭귀지를 나름 심각하게 지켜보던 직원의 표정이 한순간 밝아지는 것이 보였다. 알아들은 것이다. 직원의 입에서 오케이 사인이 떨어지며 직접 안내해주겠다고 하자 아내가 코너 뒤에 서있는 나를 뒤돌아 보며 또다시 또박또박 외쳐댔다. '팔로우 미~' 역시.. 부끄러움은 오롯이 나만의 몫이던가..
어딜 가도 굶어 죽을 여자는 아니구나. 이제 아내 걱정일랑 말고 내 발등의 불 먼저 걱정해야겠다. 앞으로 개강까지 2주 남짓 남았다. 학교로 면담을 가보니 예상했던 대로 우리 과에 외국인은 나뿐이라고 한다. 외국인에다 영어도 서툴고 나이는 교수 벌이다. 이제는 정말로 실전이다.
https://www.instagram.com/jaeyik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