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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지시험만으로 강제 퇴교를 시키겠다고요?

제주도 기타 공방, 일러스트레이터

by jaeyi

남편' 장기주

-동기

개강 후 3-4일이 지났을까 점심시간이 되어 여느 때와 다름없이 구내식당에서 도시락을 열고 있을 때였다. 눈인사 정도만 주고받던 동기중 한 명이 인사를 건네며 학교에서는 처음으로 사적인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짧은 대화 속에서도 시종일관 내 영어실력을 세심하게 배려해주는 모습을 보며 그가 속 깊고 예의 바른 청년이라고 느껴지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리라. 그는 바로 내 옆자리 짝꿍인 폴 모츠였다. 이후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함께 식사를 하는 친구가 되었고 또 얼마 후부터는 곳곳에 흩어져 먹던 다른 동기들도 하나둘씩 우리의 테이블로 도시락을 들고 오며 자연스럽게 그룹을 이루기 시작했다. 점심식사 친구들로는 10대부터 60대까지 나잇대가 골고루 섞여있었는데 그중에서도 폴은 가장 어린 축에 속하는 19세이다. 그러나 짐짓 놀라운 것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학과 내에서 자연스럽게 폴이 리더 격이 되었다는 것이다. 활달하면서도 어른스러운 폴은 나뿐만 아니라 모든 동기들에게 호감의 대상이니 충분히 가능한 일일수는 있지만 사실 우리나라에서는 막내 격인 나이 하나만으로도 이런 일은 결코 흔한 일은 아닐 게다. 이후 미국인들은 정말로 나이를 의식하지 않는구나 몸소 목격한 덕분인지 나 또한 자연스럽게 내 나이에 대한 부담감을 홀가분하게 던져버릴 수 있었다.


IMG_8380 (1).JPG 가끔 아내는 그 어린 폴과 말이 통해? 라고 묻는다. 어짜피 말은 그 누구와도 잘 통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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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4.jpg 어쩌다 모자라도 벗으면 그제야 내 나이를 새삼 인식하며 머리숱 없는 것을 놀리는 녀석들도 있지만 불편하고 어색한 어른 대접보다야 오히려 그 편이 마음 편하고 내 스스로도 자유롭다






915-3a.jpg 고 자위해 보지만 상점의 가발코너에서 나도 모르게 발길이 멈추어지는건 무슨 이유일까



- 쪽지 시험만으로 강제 퇴교라니

첫날은 브라이언 교수가 벨트 샌더와 디스크 샌더 등 여러 가지 공구에 대해 설명했다. 제일 먼저 등장한 공구는 샌딩 머신이었는데 이것이 아무래도 전동 공구 중에는 그나마 안전한 공구 중에 하나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 수업 후에는 간단한 온라인 시험을 치러야 한다고 했다. 즉, 전동공구의 설명을 듣고, 안전에 대한 빈칸 채워 넣기 식의 쪽지 시험을 보는 것이다. 그다지 어렵지 않을 기초상식이었으므로 마음 편하게 수업에 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수업이 끝나고 시험에 앞서 이곳에서는 낯설게 느껴지는 교수의 날 선 엄포가 뜻밖에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시험에서는 무조건 만점을 받아야 하며 기회는 오로지 세 번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만약 세 번의 시험 동안 만점을 달성하지 못하면 이유불문 무조건 퇴교조치를 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공구를 다루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안전수칙이며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학생은 더 이상 교육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설명 또한 이어졌다. 교수의 말이 끝나자 일순간 교실에 팽팽한 긴장감이 돌기 시작했다. 그의 말이 농담이나 과장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동기들도 웃음끼 사라진 얼굴로 조용히 수험실로 자리를 옮겼다.


수험실에서 다른 동기들은 시험을 대부분 금방 끝내고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예상대로 시험은 상식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쉬이 자리를 털고 일어날 수 없었다. ‘어떻게 들어온 학교인데 이깟 쪽지 시험 하나로 퇴교를 당할 수는 없잖아.’ 마지막 남은 수 분까지 신중을 기하였다. 하지만 첫 번째 시험에서는 나를 포함해서 네 명이 탈락했다. 역시 질문이나 답을 완벽히 이해하지 못했던 부분이 분명히 있었던 듯하다. 그리고 그다음 주에 다시 치르게 된 두 번째 시험에서도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키며 어느새 텅 빈 수험장에 나 홀로 남아 있게 되었다. 수험장에 들른 교수가 홀로이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내 모습을 보며 애처로운 눈빛을 차마 감추지 못하는 듯하다. 그러나 나는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할 겨를조차 없었다. 첫 번째 시험에서 세네 개나 틀린 답이 나온 이상 두 번째 세 번째라 해도 안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 갈수록 이번에도 불합격이면 어떡하나. 세 번 모두 불합격하면 어떡하나. 외국인이니 좀 봐달라고 생떼라도 써야 하나. 별의별 오만가지 잡다한 생각이 내 마음을 더욱 불안하게 옥죄이는 지경에 이르렀다. 더 이상은 붙들고 있는다고 더 얻을 것도 없어 보였다. 엣다 모르겠다 이윽고 눈을 질끈 감고 시험 완료 키를 눌러버렸다.


삶이 시험이고 시험이 삶이고


다행히도 그렇게 두 번째 시험에서는 합격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 나와 함께 두 번째 시험을 치렀던 동기중 두 명은 또 탈락이었다. 그 친구들에게 나는 외국인이라 쳐도 너네는 뭐냐며 짐짓 농담까지 건네고 나니 그제야 어깨가 뻐근해 온다. 그것도 시험이라고 정말로 긴장했었구나 싶어 허탈하게 헛웃음이 나왔다. 다행히 나머지 동기 둘도 세 번째 시험에서는 모두 만점을 받을 수 있었다.


마을 행사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있는 알렉스




a13a.jpg 미네소타는 호수의 나라라는 뜻이다. 약 만개의 호수가 있는 이곳은 호수가 모래사장과 함께 바다처럼 펼쳐져 있다.


아내' 김재이

-도시락

이곳 미국에서의 생활에서 이전의 모습과 달라진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내가 남편의 도시락 싸는 일을 즐기게 된 것이다. 나는 원래 음식 만드는 일을 워낙에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남편도 나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사실 그렇게 된 전체의 이유라고는 생각되지 않지만 그래도 작게나마 영향을 미친 계기가 하나 있기는 하다.


대부분의 남편 동기들이 이 도시락에서 한국음식을 처음 접하게 되며 자연스럽게 점심시간마다 한국 음식에 대한 남편의 소개말에 이어 시식자들의 맛 품평까지 이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 날이면 남편이 하교 후 도시락 무용담을 적당한 칭찬과 더불어 나에게 전해주는데 그것이 어느새 내게는 꽤나 소소한 재미가 된 것이다. 이후부터는 부러 도시락의 양을 늘리고 매운맛을 줄이기도 하며 그들이 천천히 우리나라 음식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단계 조절까지 하는 신경을 쓰기에 이르렀다. 그러던 어느 날인가는 셰프가 한때 꿈이기도 했다던 알렉스가 김밥을 손수 만들어 보겠다고 큰소리치고 난 후 정말로 단체 대화방에 어설프나마 대충 김밥의 모양새를 갖춘 결과물을 올려 모두에게 웃음을 선사하는 일도 있었다. 직접 만들어 보겠다고 한 시간이나 걸리는 한인마트까지 찾아갔다니 김밥 찬사가 영 빈말은 아니었던 듯하여 내심 뿌듯하기도 하였다.


우리도 미국이 처음이지만 대부분의 그들에게도 한국인은 우리가 처음이다. 가끔은 그들이 앞으로 살아가면서 코리아 하면 제일 먼저 우리를 떠올리지 않을까, 그때 그들은 우리 부부를 과연 어떻게 기억해 낼까 라고 문득 궁금해지기도 한다.



pen and Acrylic on wood 20"x16" First United Methodist Church_Red Wing MN



-향수

그림 속 건물은 우리가 살고 있는 미네소타 레드윙이라는 마을의 오래된 교회이다. 그곳을 지나다 우연히 깃털 하나를 주었고 나는 그것을 펜대에 꽂고 그 교회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완성된 그림 속 건물은 멀리 놓고 보면 그저 벽돌로 지어진 건축물 그림이지만 한 발자국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작은 벽돌속으로 또 다른 작은 그림들이 비로소 보이게 된다. 실제로 레드윙 역사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이 교회를 멀리서 본 것과 가까이 다가가서 벽돌을 마주했을 때의 느낌은 전혀 달랐다. 벽돌 하나하나마다 저마다의 문양과 색을 다르게 갖고 있던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것에서 의외의 것을 보게 된 것이다. 그것에서는 왜인지 모르게 내 고향의 파도가 넘실거렸고 바람이 느껴졌으며 또 때로는 나의 고양이가 보이기도 하였다.


나는 그렇게 때때로 전혀 의외의 곳에서 의외의 것으로 뜬금없이 가슴이 아려왔고 주책없이 눈물이 나곤 했다.

915-5.jpg 어쩌면 제주에서 날아온 새가 떨군 깃털은 아닐까 라는 바보같은 상상까지


벽돌속에는 바람이 있고 파도가 있고 나뭇잎이 있고 또 때로는 나의 고양이가 있다


벽돌 3천5백2십5장. 하나하나 그려 넣다 보면 내가 지금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인지 도를 닦고 있는 것인지. 그렇게 나는 책상에 고개를 처박고 근 몇 달간 고향으로 돌아가는 겨우 한두 걸음의 발자국을 화폭에 새겨 넣는 고행을 자처하고 있다.


어느덧 시월에 가까워지자 마을 어귀에 안보이던 거대한 포클레인들이 일렬로 즐비해 있다. 무엇인가 했더니 눈을 치우는 포클레인이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밤이 되면 집집 테라스마다 크리스마스트리가 벌써부터 반짝이기도 한다. 지금의 미네소타 레드윙은 겨울을 목전에 두고 모두들 묘한 긴장감과 묘한 설렘이 교차하는 듯 분주하기도 하고 또 차분하기도 하다. 우리는 아직까지 철없는 기대감만으로 눈의 왕국 미네소타의 겨울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이윽고 미네소타에 겨울이 오면 캐나다행 열차를 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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