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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첫 번째 전시회는 갤러리 비상구 앞에서

기타 제작가와 일러스트레이터 부부의 미국 유학기

by jaeyi




남편' 장기주

-버터 발음

정확히 알고 있는 단어인데도 불구하고 발음 때문에 동기들이 못 알아들어 서로 당황하는 일들은 아직도 반복되고 있는 어려움 중 하나이다. 흔히 우리나라에서는 영어 발음을 한껏 굴려서 발음하면 듣는 이가 오히려 민망해하기도 하고 특히나 허물없는 사이에서는 당사자를 면박주기 일쑤가 아니던가. 실은 나도 과거에 외국 좀 살다왔다는 친구 녀석의 리얼한 외래어 발음을 두고는 대놓고 놀렸던 적이 없지 않았던 듯하다. 그런데 이제 상황이 바뀌어 보니 각오했던 것보다도 더욱 심오하게 발음을 굴려야 한다는 현실과 마주한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미국인들이 도통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하니 못해서 안 하는 것이 아니라 안 해서 못하는 버터발음에 대한 오글거림을 한시라도 빨리 떨쳐 내야겠다는 다짐이다.


얼마 전 주유소에 들른 길에 로또 판매소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로또 본고장에서의 도전을 외치며 아내에게 이곳에서는 로또를 로터리라는 이름으로 불린다고 설명해주고는 점원에게 로터리를 주문했다. "켄아이 갯어 로터리~" 그러자 점원이 단번에 왓? 하며 고개를 갸우뚱한다. 순간, 어김없이 나도 모르게 얼굴이 달아오르며 당황하기 시작한다. 이놈의 영어 울렁증은 저놈의 왓 소리만 나오면 언제고 지체 없이 순식간에 발병해 버리고 마니 이 불치병은 언제 즘 치유가 되려나.


"소리, 로러리~ 로러리 플리즈." 그제야 가게로 들어온 아내가 얼굴이 벌게져 로러리를 연발하고 있는 내 옆에 와서는 키득거리며 마치 남의 일처럼 발음 완전 느끼해~라고 놀린다. 지금 이게 나 혼자 잘 먹고 잘살자고 굴리는 발음이던가. 아내마저도 이러니.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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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대학

기타 제작 수업은 지난주까지는 브라이언이 거의 모든 수업을 진행했는데 오늘부터 두 수업 모두 데이비드가 수업을 진행하게 되었다. 교수 중 가장 연장자인 데이비드는 기타 제작가로서 존경할 만한 인물이다. 다만 그에게는 손을 떠는 증상이 있어서 처음에는 수업 내내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염려는 어느새 말끔히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신기하게도 그의 손은 평상시에는 제멋대로 떨리다가도 일단 작업에 들어가는 그 순간, 거짓말처럼 손떨림이 사라지며 그 누구보다도 빠르고 정확해지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인해서 이제는 더 이상 나도 동기들도 그의 떠는 손을 전혀 의식하지 않게 된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비록 겉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미래의 우리 모습을 그를 통해 조심히 그려보며 존경의 마음을 새기게 되었다.


평소보다 40분 일찍 집을 나섰다. 영작 교수 피트를 만나기 위해서이다. 내게는 가장 어렵게 느껴지는 이 영어 작문 수업을 혼자서 고민만 하지 말고 일단 그와 상담을 해보아야겠다는 판단이었다. 다행히 옳은 판단이었다. 피트는 내 sos신호에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었다. 다른 학생이 작성한 템플릿을 제공해 주었고 그 외의 여러 가지 풀리지 않던 궁금증도 자세한 설명과 함께 팁까지 얹어 주었다. 역시 혼자서만 끙끙거리며 고민하지 말고 무엇이든 적극적으로 임해야 겠다는 생각이 다시 한번 드는 하루였다. 피트의 방을 나서며 문득 내 첫 번째 대학생활은 어떠했던지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이미 까마득하지만 최소한 지금처럼 이렇게 열심히 공부하지 않았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이런들 저런들 어떠하리. 첫 번째도 두 번째도 나에게는 모두 소중하기만 하다.

930-2.JPG 왼쪽 데이비드의 공방에서_교수 데이비드는 따로 존재하고 사진속 데이비드는 학과 동기이자 좋은 친구이다. 데이비드 또한 기존의 프로 기타제작가이지만 나처럼 두번째 대학을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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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로윈 데이가 다가오자 어디를 가나 호박세상이다.



눈의 왕국 미네소타답게 분명히 어제까지는 가을이었는데 오늘은 겨울이다.



10월 말에 첫눈이 야무지게 내렸고 그 이후에는 한참이나 눈소식은 없었다.




아내' 김재이

-레드윙 아트 갤러리

이곳에서의 내 첫 그림의 건축 모델이었기도 하고 레드윙의 랜드마크라고도 할 수 있는 레드윙 아트 갤러리는 이곳에 온 이후부터 줄곧 내 로망이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곳에 내 그림을 전시해 보자는 목표도 생기었다.

그리고 얼마 전 비로소 그림 석 점이 완성되었을 때 나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그림을 그곳에 선보이기로 결심했다. 물론, 첫 시도부터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다만, 당신의 갤러리에서 멀지 않은 곳에 '나'라는 열정적인 그림쟁이가 있다는 사실만이라도 기억해줘 라는 눈도장이라고나 할까. 그러나 그런 용감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나와 그림을 소개하는 메일을 보낸지 수일이 지나도록 의례적인 답변조차 없었다. 무시당한 듯하여 섭섭함을 감출 길 없었지만 그 또한 내가 어쩔 수 있는 일이 아니었기에 그저 잊어버리려고 노력할 뿐이었다.


그런데 수일이 지난 어느 날, 메일함에 낯선 알림이 떠있었다.

'좋아요. 이 정도면 당신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 수 있었어요. 그래서 우리는 당신에게 기회를 줄 생각으로 이번 우리 갤러리에서 개최하는 스몰 픽처 전시회에 재이 당신에게도 참가자격을 주기로 결정했어요. 이미 전시회 참가자는 모두 정해진 상태이고 접수기간도 끝났지만 이를테면 이것은 당신을 위한 혜택인 거죠. 자, 어때요. 참가하겠어요?'


내용은 간결하고 시크했지만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분명한 캐스팅 내용이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였다. 그들이 내 그림을 기다려 줄 수 있는 시간은 단 일주일뿐이라고 했고 나는 그 전시회에 맞는 규격의 그림을 갖고 있지 않았으므로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를테면 도전해볼 테면 해보고 말 테면 마라라는 뜻으로 들리기도 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이미 전시회까지는 채 2주도 남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나는 그녀의 메일에 바로 답장을 보내지 못하고 하루 동안 치열하게 고민했다. 그 시간들마저 이럴 시간에 빨리 그림을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라는 불안함으로 머릿속이 더욱 복잡해지기도 했다. 작은 그림이었기에 서두른다면 마냥 불가능한 일만도 아니었다. 하지만 역시나 결론은 처음부터 이미 내어져 있던 것이었을까. 아무리 간절하다고 한들 없는 작품을 급하게 서둘러 그려내 봐야 오히려 더 큰 후회만 남길 것이라는 생각을 결코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끝내 거절 메시지를 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어쩌면 다시 오지 않을 기회를 나 스스로 저버린 것일지도 모른다는 후회와 한숨으로 한동안 멍하고 무기력한 상태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렇게 하루하루를 흘려보내야 했다.


gallery _ Red Wing Arts


-첫눈이 가져다준 소식

며칠 전부터 이곳은 첫눈 예보로 마을이 온통 들떠있었다. 그리고 나는 첫눈 소식과 함께 뜻밖의 반가운 소식도 받을 수 있었는데 그것은 얼마 전 전시회 참여에 대하여 거절 메시지를 보낸 이후 십수일이 지난 후 갤러리에서 보내온 새로운 메시지였다. 그것은 레드윙 아트 갤러리의 상시 전시 작가로의 초대장이었다. 근 한 달 동안 내 속을 까맣게 태웠던 도저히 실현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그 일들이 어느 한순간 마치 원래 성사되기로 예정되어 있던 것처럼 순조롭고 빠르게 이루어져 버린 것이다. 나는 부푼 마음으로 그림을 들고 그곳으로 달려갔고 이윽고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계약을 하고 드디어 꿈에 그리던 레드윙 아트 갤러리의 전시 작가가 되었지만 이름도 없는 무명작가의 작품을 언제 즘 전시해줄지는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전시가 되고 나면 메일로 알려 주겠노라 라는 기약 없는 답만 듣고 돌아와야 했다. 그리고 또 2주의 시간이 흘러서야 갤러리 매니저인 레이시에게서 드디어 내 작품이 전시되었다는 연락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남편과 나는 뛸 듯이 기뻐하며 다음날 바로 갤러리에 방문했고 서둘러 전시장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하지만 어디에고 내 작품은 눈에 띄지 않았다. 아직 전시되지 않은 걸까. 우리가 너무 빨리 온 걸까. 라며 레이시를 찾아 뒤돌아 나오는 순간, 다소 힘이 들어간 남편의 손이 내 어깨를 감싸며 작고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 전시되어 있네요. 문 옆에.."


남편이 가리키는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겨보니 그곳은 전시장 밖 안내데스크를 지나서야 있는 기념품을 판매하는 구석진 장소였다. 그리고 내 그림들은 그런 잡다한 기념품들과 뒤섞여 비상구 옆 상단에 초라한 모습으로 대충 성의 없이 걸려있는 것을 그제야 볼 수 있었다. 그 실망스러운 광경을 마주하자 잠시 멍해졌지만 나는 빠르게 정신을 차리고 상황과 주제를 파악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괜찮아. 첫술에 배부른가? 그래도 입성은 했잖아. 아마 신인작가들은 모두 이 자리를 거쳐갈 거야. 당신 꽃 사온 다는 거 내가 말리길 잘했다. 망신당할 뻔했네."

라고 오히려 너무 슬픈 눈으로 나를 애처롭게 바라보는 남편을 위로하며 애써 웃어 보였다.


exit _ Exhibition



그리고 곧 레이시가 우리를 만나기 위해 들어섰고 그녀와 남편이 이야기하는 동안 다른 직원들도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레이시뿐만 아니라 다른 직원들까지도 나에게 모두 과한 축하 메시지를 건네는 것이 아닌가.

"hi. jaeyi, Congratulations!"


그다지 축하할 상황까지는 아니 되어 보이는데 미국인들은 리액션 하나는 정말로 끝내주는군.이라고 생각하며 표정 관리하기 힘든 김에 열심히 사진 찍는 척이나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때 레이시와 이야기를 나누던 남편이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다가와 이야기를 전달했다.


"당신 그림 두 개가 벌써 다 팔렸데!"

나는 지금 이 남자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도통 이해가 가질 않았다. 이렇게 천대받고 보이지도 않는 구석에 처박혀 있는 이 불쌍한 내 그림들을 도대체 누가 보아주고 또 누가 구매까지 해주었다는 말인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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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윙 건물화 시리즈
JaeyiKim_passion.jpg 최근작_ 열정 Passion _ Pen & Acrylic 18x24"


갤러리에서는 이달 중순까지 본 전시회장에서 기획된 다른 전시회가 진행 중이었다. 그러므로 빈 공간이 없었고 레이시는 일단 비상구 옆 남은 공간에 내 그림 석점중 두 점을 걸어두었던 것이다. 물론 그 전시회가 끝난다고 해서 내 그림을 본 전시회장으로 옮겨주었을는지 아니면 그냥 그대로 그 비상구 옆이 내 그림의 본 자리였는지는 끝내 물어보지는 않았다. 이미 그것보다 더욱 놀라운 일이 발생했으니 말이다. 레이시는 곧 새로운 주인들에게 전달될 내 그림과 작별인사를 하라고 우리를 부른 것이라고도 덧붙였다.


그렇게 나의 첫 비상구 전시회는 비록 초라했지만 놀랍게 마감될 수 있었다.



수익금은 전액 한국 입양인 센타와 사회단체에 갤러리를 통하여 기부하였다. 왠지 그것이 도리인것 같았다.



https://www.instagram.com/jaeyi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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