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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토플에 합격하고 비자까지 나올 줄이야

기타 제작가와 일러스트레이터 부부의 미국 유학기

by jaeyi


아내' 김재이

-공약

만학도가 되어버린 남편의 미국 유학길은 오래전부터 예정되어있기는 한 일이었다. 남편과 연애를 하고 결혼생활을 하며 처녀시절부터 함께한 노견 두 녀석의 뒷바라지 때문에 여행 한번 다녀보지 못한 것이 남편에게 항상 마음속으로 미안했다. 그리고 그 미안함은 어느 때부터인가 나도 모르게 기약 없고 조금은 허황된 공약을 만들어내는 계기가 되었던 듯하다.

‘강아지들 늙어서 곱게 보내고 나면 당신 꿈인 기타 제작 학과 찾아서 어디든 유학 보내줄게요.’

그러나 사실 10년을 우려먹은 생색내기용 이 공약을 정말로 실행하게 될지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뒤돌아보니, 평범한 회사원이던 그가 빌라 곁방에서의 초라한 시작이었지만 정말로 기타 제작가가 되어 있었고 그 이후로도 수년간 포기하지 않고 그 꿈을 이어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러나 마나 40대 중반이 다되어 그제야 시작한 영어로 토플 시험에 합격한다는 것은 남편을 포함해 나와 주변 사람들 모두 회의적이었기에 여전히 미국으로의 유학길은 현실성이 없어 보였다. 그렇게 나는 최근 얼마 전까지도 사태의 심각성을 전혀 깨닫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작년 여름, 에어컨도 없는 공방에서 그나마도 시골마을이라서 영어학원 하나 다니지 못한 채 독학으로 비지땀을 흘리며 그야말로 사투에 가까운 공부를 이어가는 그를 보며 간혹 이런 생각도 하곤 했다.


'정말 지독히도 열심히 공부하네. 그런데 공부머리가 좋은 편은 아닌가 봐. 입시 때도 분명히 저렇게 공부했을 텐데 머리까지 좋았으면 인 서울이었겠지. 노력이 가상하니 토플시험에 합격을 못해도 기타 제작 해외 단기 프로그램 정도라도 꼭 밀어줘야겠어'

하지만 내 예상과는 달리 첫 토플시험에서 턱걸이지만 덜컥 합격을 했고 나이가 많아 비자가 나올 가능성도 희박하다는 유학원의 우려마저 깨고 비자 또한 손쉽게 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십 년 동안 욹어먹었던 비현실적인 약속을 이제는 정말로 지켜야 할 때가 눈 앞으로 성큼 다가와 버린 것이다.


이렇게 남편 덕분에 떠밀리듯 가는 예상치 못한 미국 살이지만 남편뿐만 아니라 어쩌면 나에게도 나머지 인생을 살아가는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되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기대도 더불어 하고 있기는 하다. 남편이나 나나 남들보다 늦게 시작한 꿈으로의 도전은 곧잘 우리들 자신을 지치고 버겁게 하기도 하지만 어찌어찌 그 시기를 버티어 내다보면 무엇이 되어서든 작게나마 삶의 소중한 의미가 되어 돌아와 주었기 때문일 게다.




-불안 증세

미국에 도착 후 집에 입주하고 차를 사고 각종 보험에 가입하고 살림을 장만하고 그제야 남편의 개강일을 기다리며 한숨을 돌리고 나니 잠시 잊고 지내던 불안병이 도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제주 집에 남겨두고 온 마당 고양이들에 대한 불안감과 그리움이었는데 이후, 거의 매일 밤을 고양이들을 잃어버리는 악몽에 시달려야 했던 것이다.


출국 두 달을 앞두고도 우리 집 마당 고양이들을 마땅히 맡길 적임자를 찾지 못하자 앞이 막막해진 나는 일단 남편만 보내고 나는 미국행을 미루거나 최악의 경우에는 미국행을 포기하려던 마음까지 먹었던 때가 있었다. 그러던 마지막 순간 그녀를 만난 건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우리 마을에는 나와 동물을 매개로 가장 신임이 두터운 지인이 살고 있는데 그 지인의 소개로 그녀를 만날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의 속사정을 알게 된 이후 역시나 동물사랑이 확고했던 그녀는 흔쾌히 우리 집과 마당 고양이들을 함께 돌보아 주기로 약조해주었다.

20.jpg 동네 어디를 가도 따라다니는 어미냥 귤이


현재 마당 고양이들은 그녀와 아주 잘 지내고 있다. 얼마 전에는 엄마 고양이 귤이가 드디어 동네에서 그녀 뒤를 미행하기 시작하며 그녀에 대한 집착을 드러내었다는 기쁜 소식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귤이가 새로운 집사를 미행하기 시작하고 사생활을 간섭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가족애가 지나치게 강한 귤이가 새로운 집사 또한 자신의 가족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는 뜻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뭐니 뭐니 해도 우리 집 마당 고양이들의 왕초는 제일 작아도 제일 늙었어도 여전히 어미 고양이 귤이 인 것이다. 그런 귤이가 새로운 집사 뒤를 뒤쫓으며 마음을 열었으니 이제 귤이의 새끼 고양이들도 그녀를 따르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다.


사람은 다 적응하기 마련인가 보다. 요즘은 잠자리가 조금씩 편안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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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장기주

-동상이몽

얼마 전 아내가 졸업을 하고 제주로 돌아가면 기타 공방의 이름은 여느 대부분의 기타 제작가들처럼 내 이름을 따서 다시 정했으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사실 몇 년 전 처음 기타 공방을 오픈하면서도 이 부분은 아내와 대립된 부분이었는데 그때는 내 고집을 꺽지 않았었다. 왠지 내 이름을 걸고 공방을 차리기에는 스스로 부끄러운 감을 떨쳐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성격 급한 아내는 이제 겨우 개강을 했을 뿐인데 벌써부터 이제는 이름을 걸어도 되지 않겠느냐고 미뤄 닦달인 것이다. 어디 그뿐이랴. 거기에 더해 기어이 또 한 가지를 걸고넘어진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이제 다 만들어 놓은 기타 마음에 안 든다고 다 해체해 버리지 않겠다고도 약속해줘요. 품질이 낮은 기타면 저렴하게 팔면 되지. 낮은 품질의 기타를 비싸게 파는 게 문제지. 품질따라 저렴하게 사고 싶은 사람들도 분명히 있다고요. 그 사람들의 욕구도 무시하면 안 되는 거지!'

세상에 공짜는 없다고 누가 말했던가. 마누라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기도 하다. 벌써부터 제주로 돌아갈 그 날이 부담스럽기 그지없다.


돌아 가고 싶지 않다


빨리 돌아가고 싶다




https://www.instagram.com/jaeyi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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