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리재 Feb 01. 2024

산책코스



누군가 나에게 산책코스를 추천해 달라고 했다.



지금의 나를 만든 구성 요소 중 가장 큰 것은 단연 '어릴 때의 기억'이다.

95년생인 내가 초등학생일 때쯤, 그러니까 2006년도쯤의 이야기다.

나는 부산의 낙동강 바로 옆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낙동강 하굿둑을 건너면 을숙도라는 섬이 있는데 주말마다, 그리고 시간이 날 때마다 가족들과 을숙도에 갔다. 가장 많이 한 것은 어쩔 수 없이 걷는 것이었다. 을숙도까지 걸어가야 하기도 했고 공원이 워낙 잘되어있어서 걷기가 좋았다.

 그리고 나면 잔디에 돗자리를 깔고 누워 한 숨 잤다. 지금은 그렇게 하라고 해도 못할 것 같은데, 돗자리 위에서 그냥 가족들이 다 같이 잤다. 나무 그늘 아래에서 자연 바람을 선풍기 삼아 한 숨 자다가,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가족들이 하나 둘 일어나 이야기를 하는 소리에 깨서 그 풍경을 멀거니 둘러본다. 내가 가진 가장 소중하고 아름다운 기억 중 하나다.

 어느 날은 을숙도에서 자전거를 타다가, 길을 잘못 들어 인적이 드문 곳에 들어갔다. 왜 '길을 잘 못 들었다'는 말을 했냐면 지금 생각해 보면 관람객들에게 들어가라고 만든 공간은 아닌 것 같다. 어릴 때라 잘 몰랐는데 길은 있어서 자전거를 탈 수는 있었지만, 유난히 사람 손을 탄 흔적이 없는 길이었다. 그래서 자연이 살아있었고 사람은 없었다. 지평선 끝까지 뻗어있는 갈대와 풀이 무성해 바람에 흔들렸다. 사람 소리는 하나도 들리지 않고, 바람 소리와 바람이 흔드는 풀가지 소리뿐이었다. 나를 막을 것이 아무도 없는 곳에서 자전거를 타고 있노라면 갈대가 맞는 바람을 나도 같이 맞으며 친구가 된 것 같았다.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멈추고 그저 그 풍경을 바라만 봤다.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강가는 이렇게 생겼구나. 이런 갈대밭을 보고서 옛날 사람들은 그렇게 시를 짓곤 했겠구나. 갈대가 방해받지 않고 마음껏 자라나 이렇게 많아지면 바람에 이렇게 흔들리는구나. 이런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방학에는 광안리 앞바다에 살았다. 거기에 아버지가 장사하시는 곳이 있었는데 거기서 지냈다. 그때는 스마트폰도 없었고 컴퓨터도 업무용으로 겨우 한 대 있었다. 매우 어렸던 내가 할 수 있는 건 몇 가지 없었다. 일단 바다에 나가 뭘 할지 생각하는 것부터 시작이었다.

 어느 날은, 평소와 같이 오빠와 바다에 나가서 놀고 오기로 한 날이었다. 신나게 놀고 홀딱 젖어서 들어왔더니, 무언가 허전했다. 전화와 문자만 가능하던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있었는데 그대로 물에 들어갔다 나온 것이었다. 그렇게 내 첫 휴대폰은 물고기 밥이 되었다.

 그리고 역시나 가장 많이 할 수밖에 없었던 건 산책이었다. 광안리 바다 끝에서 끝까지, (지금은 없어졌지만) 예전에 바이킹이 있던 곳에서 아파트 단지 쪽 큰 화분 조형물이 있는 곳까지. 하염없이 걸었다. 어린 나는 시간이 많았고 바다는 나를 전혀 재촉하지 않았으니까.

 바다 앞에 살며 해변을 산책하는 일상이라니 부유해 보이는 서술이지만 그렇지 않았다. 아버지 가게의 작은 방에서 4인가족이 지내며 붙어 자고 생활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을 뽑으라면 이때를 꼽는다. 하염없이 나를 기다려주는 바다와 부모님은 닮았었다.


 그래서 2024년, 지금 산책 코스를 생각해 보자면 한강을 자주 간다. 마음이 답답하거나 슬픈 일이 있으면 강가에 간다. 내가 어떤 마음이어도 강은 어릴 때와 마찬가지로 나를 가만히 기다려 준다. 그리고 가만히 있으면 바람에 흔들리는 풀소리가 들리는 공원에 앉아 책을 본다. 눈은 책을 보고 있지만 머릿속에는 지평선까지 자라난 풀가지의 그림자가 땅 위에서 흔들리고 있다. 나는 그래서 야외를 좋아하지 건물에 갇혀 걷기만 하는 헬스장에서는 걷기를 잘 안 한다.


 러닝머신을 이용하지 않고 산책을 하는 이유는 사람마다 있을 것이다. 그 이유가 운동만 하기 위해서는 아닐 것 같다. 그래서 산책 코스를 고르자면 내면의 내가 무너져도 괜찮을 것 같은, 그냥 인생이 어떻게 흘러가도 괜찮을 것 같은 곳에서 걸으면 좋겠다. 거기서 위로를 받기도 하고 생각을 해보기도, 생각이 없어보기도 했으면 좋겠다.

 지리만큼 중요한 건 내 마음인 것 같다. 내가 되고 싶은 모습이 아니어도 어떤가. 한 때 나는 러닝머신에서 깔끔하게 걷는 부지런하고 효율적인 사람을 꿈꿨으나 내 마음이 선택한 곳은 물이 있는 흙밭이다. 누군가는 도심일 수도 있고, 골목일 수도 있고, 터널일 수도 있다.

 그래서 본인이 좋아하는 곳을, 자신만의 산책코스를 발견하기를 바란다.

작가의 이전글 내가 전시를 보는 기준 : 몰입과 경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