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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서 Apr 30. 2021

비가 온다는 사실을 나는 믿지 않았다

자작 소설

비가 온다는 사실을 나는 믿지 않았다.

맨 꼭대기 집이라 만약 비가 온다면 지붕에 비 떨어지는 소리가 톡톡 들려야 하는데 그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현재가 집안에 들어오면서 밖에 비가 많이 온다고 말하며 젖은 머리를 털어낼 때도 나는 믿을 수 없었다.

현재는 쇼파에 눕다시피 기대 있는 나를 힐끗 보고 그대로 지나쳤다. 그에게 말을 걸려고 입을 벙긋거렸지만 무슨 연유에서 인지 마치 마녀에게 목소리를 빼앗긴 인어공주처럼 목구멍에서는 공기 뭉텅이만 빠져나왔다.

그는 젖은 양발을 벗어 빨래통에 넣어두고는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다시 나는 빗소리에 집중하기로 했다. 비가 온다면 빗소리가 들려야 하는데 왜 지금 나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을까. 아무리 집중을 해도 빗소리는커녕 수도꼭지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조차 들을 수 없었다.

천천히 몸을 일으켜 베란다 쪽으로 다가갔다. 버티컬을 올리니 창밖은 정말 비가 오고 있었다. 습기로 인해 뿌연 창문을 옷소매로 닦아내고 창문을 열었다.

빗소리가 선명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창밖으로 손을 뻗자 손에는 방울들이 맺히더니 곧 팔뚝을 타고 흘렀다.

“뭐해 문 닫아 비 들어오잖아.”

언제 나왔는지 현재는 물을 따르면서 나에게 말했다. 나는 뒤돌아 그를 바라봤다. 현재는 나를 보지 않았다. 그러다 뭐가 이상하다고 느꼈는지 고개를 들어 나와 마주했다.

“문 닫으라고 비 들어오니까” 내가 못 들었다고 생각했는지 그는 턱으로 성의 없이 창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짜증이 묻어 나오는 목소리는 아니었다. 그냥 아무런 감정을 느낄 수 없었을 뿐. 그의 무미건조한 눈빛에 익숙해진 내 자신이 비참했다.

“우리 이제 그만할까.”

내 말에 그는 동그래진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사귄 지는 4년 월세를 아끼자는 이유로 같이 산지는 3년이지만 나는 여전히 그의 얼굴 속 감정을 읽기가 어려웠다. 이런 날이 올 거라는 걸 알면서 막상 들으니 놀란 건지 아니면 예의상 놀란 척이라도 하는 건인지 나는 알 수가 없었다.

나는 내가 울거나 혹은 목소리가 떨릴까 봐 걱정했지만 생각 외로 담담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을 서로를 바라보다 그가 침묵을 깨고 말했다.

“그래 그렇게 하자. 내가 나갈게 나중에 집은 어떻게 할 건지 연락 줘. 급하지는 않으니까 서두를 필요는 없고.”

마시던 물 컵을 내려놓고는 할 말이라도 더 남았는지 그는 애꿎은 물컵만 만지작거렸다.

“그럼 나는 짐 챙겨야겠다.”

그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고 곧이어 가방 열리는 소리와 물건을 정리하면서 나는 소음이 거실까지 침범해왔다.

나는 비가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만 창문을 조금만 열고 커피를 마시기 위해 주전자에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너는 언제부터 나와의 이별을 준비했는지. 왜 이유도 묻지 않는 건지. 4년의 시간이 내 한마디면 끝날 수 있는 거였는지. 한편으로는 스스로가 가증스러웠다. 변한 건 그뿐만 아니였으니까. 나 또한 과거의 애정과 열정은 찾을 수 없었고 끊임없이 이별의 과정을 머릿속으로 상상해왔다. 그와의 이별은 나와 그 두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였기에 곪아 터진 상처를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연인이라는 서로의 역할을 4년이나 수행한 만큼 우리의 이별은 주변 사람들의 화젯거리가 될게 뻔했다. 나는 그 화젯거리의 주인공이 될 거라면 악역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가 변한 거라고. 나는 잘못한 게 없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주전자의 물 끓는 소리가 위험이라도 감지한 화재경보기처럼 삐 하고 울리자 나는 부질없는 생각하지 말자 하며 인스턴트커피 한 봉지를 넣고 물을 한가득 부었다. 컵에서는 김이 나고 손잡이까지 잠식한 열기에 만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커피를 바라보기만 했다. 커피 향이 거실 곳곳으로 퍼졌고 곧바로 나는 커피를 마시려 한 나의 선택을 후회했다. 한동안 커피 향을 맡으면 오늘이 생각 날 테니까.

‘이럴 줄 알았으면 맥주를 마실걸 그랬나. 그랬으면 한동안 금주라도 했을지도 모르지.’ 심각한 상황 속에서도 이런 우스운 생각을 하는 나의 모습이 그저 어이가 없었다.

빗소리 시계 초침 소리 그리고 그의 방 안에서 나는 소음이 한데 뒤섞여 방안을 가득 채웠다.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건지 흰 뭉그런 김이 더 이상 나지 않자 육안으로 이게 커피인지 콜라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곧 그가 방에서 나왔다. 적은 짐에 멋쩍은 듯 그는 가방을 살짝 흔들며 말했다.

“작업실에 다 갖다 놔서 그런지 짐이 별로 없네. 혹시 내가 두고 간 거 있으면 버려도 돼 너 쓰고 싶으면 써도 되고.”

그리고 그는 현관으로 향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따라 현관으로 향한 뒤 팔짱을 끼고 신발장에 몸을 기댄 채 말했다.

“밑에까지는 못 내려가.”

그는 내 말에 알 수 없는 표정을 짓더니 갑자기 나를 와락 안으며 말했다.

“잘 지내.”

짧은 포옹을 마치고 그가 나갔고 계단 내려가는 소리가 사라질 무렵 나는 내가 서 있던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가 나를 안은 건 나에 대한 사랑이나 미련 따위의 이유가 아니었다. 그냥 지난 세월에 대한 마지막 예의 정도. 그도 나도 마지막을 망치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 그래야 누구를 만나 우리의 이별을 말해도 “우리는 서로를 존중하며 그렇게 잘 어른스럽게 마무리했어.”라고 할 수 있으니까.

눈물이 나지 않는 걸 보니 나는 슬프지 않은 것 같다. 아니면 너무 슬퍼서 눈물이 나지 않는 걸까. 그러다 내 시선이 닿은 곳은 주인 잃은 방이었다. 들어갈 엄두는 나지 않아 나는 살짝 방문을 열어보기만 했다.

한동안 나도 그의 방을 들어가 본 적이 없었다. 이 방이 그의 작업공간이기도 했고 요 근래에는 그가 나를 찾지 않은 것처럼 나도 그를 찾지 않았으니까. 조심스럽게 방 안으로 들어가자 그의 채취가 물 양동이라도 뒤집어쓴 것처럼 확 쏟아졌다. 방안을 두리번거렸다. 그 냄새가 없었더라면 잠시까지 만해도 그가 이방을 썼다는 사실을 믿기 힘들 정도로 방안에는 그의 흔적은 없었다. 방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베란다로 가 창문을 끝까지 열었다. 비가 집안으로 들이닥치는 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심호흡을 크게 쉬자 코 끝에 머물던 그의 채취는 곧 물 비린내, 젖은 흙냄새로 사라졌다
.
빗소리가 세차게 들리고 나는 소파에 누워 눈두덩이를 팔목으로 가렸다. 형광등 빛이 들어오지 않자 깊은 어둠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빗소리는 더욱 선명하게 들리고 심장이 규칙적으로 뛰는 게 느껴졌다.

창문으로 빗줄기가 들이쳐서 베란다 바닥은 흥건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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