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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원입니다 Mar 31. 2024

저를 만만하게 보시면

쿨톤 - 분홍색 분위기미인

변화     


  송유리의 변화는 평범한 날 시작됐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하늘색과 구름 모양을 살피느라, 바람이 불면 잠시 멈추어서 바람을 쏘이느라, 특히나 영롱하게 빛나는 나뭇잎이 보이면 감탄하느라 느릿느릿 등교하고 있었다. 정문 앞에 다다랐을 때 웅성웅성하는 곳이 보였다. 자주 있는 일이었다. 어떤 날에는 시비가 걸리기도 하고 어떤 날에는 잡상인이 신기한 물건을 팔기도 하고 어떤 날에는 고백하는 장면이 연출되기도 하니까. 그런 것들에 관심 없는 송유리로써는 부딪치지 않고 지나치는 것 정도가 목표였다. 그런데 그날 송유리를 잡아 세운 말이 있었다. “참여하는 모든 분들께 도서상품권을 드려요.” 확실한 보상이었다. 



  줄이 길었다. 마침 소장하고 싶은 하드커버 소설책 한 권이 있었는데 용돈이 부족했다. 하지만 ‵무엇에′ 참여하는 건지도 모른 채 긴 줄에 참여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송유리 성격에 앞사람을 툭툭 쳐서 물어볼 염치는 더더욱 없었다. 10분 정도 기웃거리다 보니 몇 가지 말이 들렸다. 무슨 설문조사에 참여하는 것이고, 어디 정부기관에서 대학생들의 실태를 조사하는 거라고. 그 순간, 송유리가 평소답지 않게 천연덕스러운 낯빛으로 중얼거렸다(그 소설책이 무척 갖고 싶었던 거다). 

 ― 나 정도면! 자격 있지!           



                 

  설문조사 결과는 각 포털 사이트 뉴스 탭에 「대학생 70% 용돈 충당 및 사회경험 쌓기 등 이유로 아르바이트 경험」이라는 제목으로 게재되었다. 그날 송유리는 설문조사 칸을 찍어 내려가면서 살짝 갈등했다. 몇 개는 거짓말을 칠까? 흔들렸다. 알바를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고하면 평균을 왕창 깎아 먹을 것이 뻔했다. 그것은 이름 모를 전국의 대학생들에게 오명을 씌울 것 같았다. 벌써부터 미안했다. 하지만 송유리는 양심껏 ‵아니요′로 일관된 설문지를 완성했다. 이 설문의 본질은 실태 조사니까 (현)대학생으로써 있는 그대로의 고백이 더욱 중요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당해도 괜찮아, 혼잣말을 몇 번해서 스스로를 다독인 다음, 어설픈 걸음으로 제출대로 향했다. 그리고 도서상품권을 타고, 수업을 듣고, 서점에서 소설책을 구입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등 뒤에 달라붙은 찜찜함을 털어내기 힘들었다.                   


         


  그러니까 송유리가 빵집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건 그 찜찜함 때문이었다. 점주는 송유리를 처음 보자마자 “아이고, 빵 같이 생긴 아가씨가 빵을 팔면 빵이 더 맛있겠어.”하며 농담을 던졌다. 볼이 포동 하고 귀여운 인상이 마음에 든다는 투였는데, 송유리는 거기에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 몰라 애매한 표정으로 팔다리를 버둥거렸다. 첫날 주어진 임무는 제빵 기사님께 빵을 받아서 먹기 좋게 진열하는 것과 계산대 언니 옆에서 빵 포장을 돕는 일이었다. 빵 나오는 시간과 손님이 밀리는 시간에는 정신없이 맡은 일을 하면 됐다. 




  문제는 한가한 시간이었다. 그 틈에는 손님들이 꼭 말을 걸었다. 무슨 빵이 제일 맛나냐고 묻고(다 못 먹어봤어요), 시식 빵은 왜 이거밖에 없냐고 묻고(제 권한이 아니에요), 혹시 어제 날짜 빵을 재활용하지는 않는지 물었다(마감시간에는 제가 없어서요). 솔직하게 말하면 안 되는 건 알겠는데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는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손님은 손님대로 짜증이 낚고 송유리는 송유리대로 속이 탔다. 다음 날, 점주가 송유리를 불렀다. 단도직입적으로 그만뒀으면 한다고 딱 잘라 전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송유리도 딱 잘라 말씀드렸다.     

 ― 아무래도 저는 계산 체질인 것 같습니다!     



쿨톤 - 분홍색 분위기미인


                       

  그것은 정말이었다. 하루 만에 28가지 빵 이름을 모조리 외운 것은 물론, 100원 단위로 차이나는 가격표도 정확히 읊었다. 뿐만 아니었다. 동네 빵집이다 보니 바코드가 없어서 일일이 다 외우고 계산해야 하는데 단 한 번을 틀리지 않았다. 간혹 한참 뒤에 돌아와서 계산이 틀렸다거나 거스름돈을 못 받았다는 손님들이 있었는데, 그때 송유리는 작지만 정확한 목소리로 그분이 사간 빵 종류와 어떤 지폐를 몇 장 내었는지 말했다. 끝까지 우기면 하는 수 없이 돌려드리긴 했으나, 열에 여덟은 수긍하며 돌아갔다. 점장은 매우 흡족해하며 일하는 시간을 늘려보지 않겠냐고 권했다.      


                         


  그러던 어느 날, 재활용 촉진 법률에 따라 1회용 봉투 값을 받는 규정이 생겼다. 취지는 공감했지만 인정상 50원을 요구하기가 참 어려웠다. 그래서 처음에는 지키다가 안 지키다가 했으나 점차 단속과 신고가 강화되었다. 몇 번 과태료 딱지를 받은 점장은 씩씩거리며 송유리에게 명령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봉투 값을 철저하게, 받으라고!              



             

  “봉급을 받으면 봉급 값을 해!” 봉투 값을 요청하니까 봉급 값을 하라고 역정을 내신 그분은 단골 할아버지였다. 소동은 15분간 이어졌다. 그간 내가 이 집 빵을 얼마나 팔아줬는데, 배은망덕하게, 그깟 봉투 값 몇 푼 벌려고 사람대접을 이렇게 하느냐, 이건 절대 사람 도리가 아니다, 내 말이 틀렸냐. 야속한 듯 원망하셨다. 송유리에게는 힘이 없었다. 고개를 조아리고 듣다가, 죄송하다고 말씀드리려다가, 억울해서 눈물이 났다. 결국 그냥 가시라고 말씀드리고 50원을 자기 돈으로 채웠다.        

     


쿨톤 - 분홍색 분위기미인



  “128번 고객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찰랑한 단발머리 은행원 언니가 다정하게 물었다. 송유리는 투명한 사각 바구니에 가지런히 올린 통장을 내밀며 통장정리를 부탁했다. 지지직- 기계음을 타고 통장에 찍힌 숫자들이 송유리 손에 도착했다. 어제 날짜로 세 번째 아르바이트비가 더해져서 백만 원도 넘는 돈이 모였다. 단순히 돈 때문에 시작한 게 아닌데 남은 건 돈뿐이었다. 이 돈으로 무엇을 하면 좋을지, 또 고민에 빠졌다. 스트레스 왕창 풀리게 책을 한 보따리 사버릴지, 엊그제 엄마가 CF 속 이영애를 보며 감탄하던 립스틱을 선물할지, 그냥 저금해둘지 저울질해봤다. 모두 내키지 않았다. 왜냐하면 송유리가 진짜 저지르고 싶은 건 따로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일 날. 송유리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그곳에 도착했다. 그날로부터, 아니 정확히는 그곳에 방문한 지 세 번째 되는 날로부터 송유리가 달라졌다. 그곳은 「해맑음」이라는 심리상담소였다. 간판에 정신의학 혹은 심리상담이라는 문구를 대문짝만 하게 내세우지 않은 곳이라 문턱을 넘기가 수월했다. 그러나 첫날은 눈치만 보다가 돌아오고, 겨우 다시 용기를 낸 두 번째 날에는 영어 말하기 대회 날에 한국어를 말한 부분을 말하다가 억한 심정이 튀어 올라와서 펑펑 울기만 하다가 돌아왔다. 




  그리고 드디어 세 번째 날이 되어서야 대화다운 대화가 이어졌다. 송유리가 진지하게 질문했다. “선생님, 사람들 앞에서 얼굴이 빨개질 때는 어떻게 해야 될까요?” 상담사가 담백하게 미소 지었다. “그냥 빨개지세요.” 송유리는 실망을 가득 담고 되물었다. “그냥 빨개지라고요?” 상담사가 말을 이었다. “반대로 한번 생각해 볼까요? 누군가가 유리 씨 앞에서 얼굴이 빨개지면서 막 당황하고 있으면, 유리 씨 마음은 어때요?” 




  유리가 그런 쪽으로는 생각해본 적 없었다는 듯 신선한 눈동자로 말했다. “아하~ 저는요? 도와주고 싶을 것 같은 대요?” 다시 상담사가 빙긋 웃었다. “그거예요. 의외로 사람들은 유리 씨를 도와주고 싶어 할지도 몰라요. 그러니까 그 사람들에게 도와줄 기회를 주기 위해서는 먼저 유리 씨를 알리세요. 그리고 도움을 받고 나서 감사하다는 마음이 들면, 또 그 마음을 알리세요. 그러면 함께 기분이 좋아질 거예요.” 그랬다. 사과가 익으면 빨간색이 되듯, 당황하면 얼굴이 빨개지는 사람은 그냥 빨개지면 되는데, 빨강이 아닌 척을 하느라 10년이 넘는 세월을 혼자 앓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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