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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원입니다 Apr 19. 2024

파랑이 이별에 대처하는 자세

귀티 컬러 - 파란색 분위기미인

귀티 컬러 - 파란색 분위기미인


이해수(놀랄 해빼어날 수)

이별을 연습합니다       



  선배와 일주일째 연락 없이 지내고 있었다. 내내 둘이 붙어 다니다가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지자 옛날을 떠올리게 됐다. 선배가 연필로 밑줄 그어놓은 소설책을 읽다가 가슴팍에 끼고 잔 날, 과자 하나 놓고 소주잔을 짠! 짠! 부딪치며 밤새 키득거리다가 세수도 안 하고 같이 학교 간 날. 진지하게 키스하는데 매미가 너무 시끄럽게 울어서 분위기 깬 날. 처음으로 아버지 얘기를 꺼내고 수습이 안 되어 엉엉 울어버린 날. 둘이 꼭 껴안고 잔 날. 불안과 불신이 많이 사라진 나날들. 그리고…… 물어보고 싶은데 물어보지 못해서 달싹거리던 입술, 눈에 띄게 일그러지던 미간. 안개처럼 잡히지 않는 이유가 늘어가던 나날들.           



귀티 컬러 - 파란색 분위기미인


       

  선배는 아나운서 시험을 준비했다. 지역 방송사 아나운서는 뉴스면 뉴스, 라디오면 라디오, 예능이면 예능, 이렇게 다양한 프로그램을 소화할 수 있어야 한다면서, 선배는 정말 열심히 살았다. 선배의 스케줄러에는 발성연습, 한국어 능력 시험 준비, 논술 공부, 시사 공부, 경제 공부, 라디오 진행 연습, 필사, 신문 음독 같은 계획들이 빽빽했다. 물론 계획은 틀어지게 마련이었고 그때마다 선배는 해도 해도 끝이 없는 게 집안일이라던 엄마처럼 지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다 전문적인 커리큘럼으로 지도하는 아카데미에 등록했을 땐, 자신감이 붙었는지 방송국이 자길 안 뽑으면 대체 누굴 뽑겠냐는 식으로 허세를 부렸다. 




  하지만 석 달이 채 되지 않아 경직된 얼굴로 아카데미 원장이 딴 놈을 추천했다고 했다. 아카데미 원장이 방송국 채용 관계자였어? 이해수가 뭔가 불공정하다는 투로 물었다. 알고 보니 지방 방송사에서는 공채 공지는 가뭄에 콩 나듯 났고, 빈자리가 생기면 알음알음으로 추천받아 오디션 보는 관례가 있다고 했다. 이번엔 이해수가, 그럼 나 따라 서울 갈래? 하고 물었는데 갑자기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그렇게 인맥에 좌지우지되는 기회를 기다리느니 제대로 공채에 도전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해서, 그리고 선배를 충분히 신뢰하니까 곧바로 튀어나온 말인데, 선배는 지금 누굴 놀리냐면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나 따라가자’는 표현이 거슬렸던 걸까? 이해수도 얼른 따라 나가서 그런 뜻이 아니라고 말하며 선배의 옷깃을 붙잡았지만, 선배는 동정 필요 없다는 말만 남기고 버스에 올라타 버렸다. 그날 일을 싸운 것으로 보아야 할지, 그저 자신의 말실수로 여겨야 할지, 잠시 연약해진 선배의 투정이었는지, 그것도 아니면…… 그냥 권태기? 생각할수록 가슴이 꽉 막히면서 식도로 신물이 올라왔다.            




  이별의 경계는 불명확했다. 헤어지자는 말이 나오진 않았지만 어느 날 자연스럽게 '그냥 선후배 사이′가 되어 있었다. 선배 특유의 유쾌한 웃음소리는 강의실에서도, 학생식당에서도, 과방에서도 곧잘 들렸지만 이해수와 따로 시간을 보내지는 않았다. 심지어 같은 수업을 듣는 날에도 별 말이 없었다. 다음 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분명히 아무 일이 없지 않은데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지냈다. 선배와 한창 사이좋게 붙어 다닐 땐 부러움도 받았지만 우려도 많았다. 너무 좋은 티 내고 다니다가 헤어지면 평판 나빠진다더라. 결국엔 불편한 쪽이 휴학하게 되어있다. 흑역사 남기지 말고 적당히 해라. 적당히. 그땐 귓등으로 들리던 말들이었지만 혹여나 그런 사태가 발생한다면 곤란해질 것이다. 어쨌거나 선배도 이해수도 졸업을 얼마 남기지 않은 취업 준비생이었으므로, 안전을 위해 되도록 조용히 헤어지고 싶었다.          



      

  “헤어졌네. 헤어졌어.” 이별에 쇄기를 박아준 건 소문이었다. 슬퍼할 겨를도 없이 씁쓸한 뒷맛이 입 안을 가득 메웠다. 그 맛을 헹궈줄 무언가를 찾았는데 담배가 보였다. 한 대 피우면 좋겠다 싶었지만, 한 대가 한 대로 끝날 것 같지 않았다. 담배 말고 좋은 게 뭐가 없을까 생각하다가 선배가 부적처럼 끼고 다니던 스케줄러가 떠올랐다. 이어 거기에 뭔가를 빽빽하게 적던 선배의 진지한 얼굴도 떠올랐다. 아니, 아니, 선배랑 다른 거, 선배보다 훨씬 가벼운 걸 하고 싶은 충동이 올라왔다. 그러다 번뜩 '버킷 리스트′가 떠올랐다. 내일부터 당장 해볼 수 있는 것들로 칸칸을 채워나갔다. 급기야 이해수는 그런 걸 생각해내는 자신이 대단히 대견하게 느껴졌다. 바람과 파도를 친구 삼아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처럼 슬픔과 쓸쓸함을 곁에 둔 채 새로운 내일을 계획하는 건, 아무나 못하는 거라는 자부심이 올라왔다.       



        

  어쩌면 일종의 정신승리였을지 모르지만, 그날 이후 이해수가 쉴 새 없이 바빠진 건 사실이었다. 초반에는 취미 수준에서 그쳤지만 점차 범위를 넓혀갔다. 영화를 소개하는 블로그를 개설했고, 가늘고 섬세한 복근을 만들어 바디 프로필 사진을 찍었고, 주식 투자로 100만 원 벌기에 성공했다. 계속되는 도전과 성공은 이해수를 휴학의 세계로 인도했고, 사정을 모르는 동기들은 이해수를 캠퍼스 커플의 나쁜 예로 기억했다. 결정적인 도전은 대학생 아이디어 공모전이었는데 주최 측이 보험사였다. 새로운 방식의 기부보험을 기획해서 차상을 받은 것이다. 아쉽게도 실제 보험 상품으로 출시되진 못했지만 같은 계열사 은행에서 대학생 홍보 대사로 활동할 기회가 주어졌다. 따지고 보면 오늘날 이해수가 어엿한 금융인으로 살게 된 건, 선배와 그렇게 헤어졌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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