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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랑코끼리 이정아 Mar 02. 2024

인도에서 흔히 만나게 되는 도로 위의 걸인들

요즘 인도 첸나이는 시내 전역이 메트로 공사로 몸살 중이다. 그렇잖아도 비좁고 무질서한 도로는 한 두 차선이 공사 현장잠식되어서 교통체증은 어쩔 수 없는 일상이 되어 버렸다.


사거리에 가까워지면 어김없이 차가 멈추고 하염없는 대기상태가 된다. 그럴 때면 언제나 보게 되는 멈춰 선 차들 사이로 오가는 사람들이 다. 어떤 이들의 일터가 바로 교통마비가 된 도로 위가 되는 순간이


예전에 비해서 길에서 자는 노숙인들은 많이 줄어든 것 같은데 도로 위의 자동차 사이를 오가며 차창을 향해서 손을 내미는 이들은 여전해 보인다.

 

자르지 못한 꽤제제한 긴 하얀 수염에, 원래 색을 가늠할 수 없는 회색이 되어가는 두건과 옷을 걸치고, 부러진 다리를 테이프로 감싼 도수 높은 안경을 쓴 할아버지가 지팡이를 짚고 도로변 화단에서 힘들게 차들 사이로 내려와서 운전석 차창을 두드린다.

수세미처럼 헝클어진 머리에, 땟국물이 흐를 것 같은 차림의 아직은 앳된 어린 여자가 허리춤에 아기를 안고 이리저리 자동차 사이를 걸으며 손을 입에 가져다 대는 시늉을 하며 차창 안의 사람들에게 불쌍한 눈빛을 보낸다.

팔에 찌든 붕대를 감고 반대 손을 차 쪽으로 내밀며 자동차 사이사이를 다니는 중년의 남자도 보인다. 골격은 남자인데 진한 화장을 하고, 화려한 색감의 인도 전통 옷 '사리'를 입은 이들이 너무나 당당하게 운전석 차창을 두드린다.


외출을 하려고 나설라치면 교통체증이 있는 사거리에서 늘 만나는 이들이다.


2009년, 처음 인도에 왔던 그때는 보이는 족족 차창을 살짝 내려서 동전을 건네곤 했다. 그날은 운수 좋은 날이 되었을 어떤 이에게는 동전이 없어서 지폐를 내미는 날도 허다했다.


그때는 그랬다. 도로 위를 헤매는 걸인들이 너무 불쌍했고, 나에게는 없어도 그만인 동전 몇 푼을 어김없이 건넸었다. 지금보다 훨씬 많았던 땡볕아래 도로 위의 걸인들을 차가 정차한 그 시간 동안 바라만 보며 에어컨 시원한 차 안에 앉아있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얼른 10루피라도 주고 편하게 있고 싶었던 것 같다. 그들이 불쌍한 이유도 있었고, 내 마음이 편하려는 이유도 있었다. 그러한 이유로 창문을 내리지 않을 용기가 그때는 없었다.


인도 첸나이 도로 풍경

세월이 흘렀다.

2024년, 15년이나 지났다.

인도 첸나이는 눈에 보이게 발전을 하고 있다. 메트로 공사가 한창이고, 고층빌딩과 아파트도 많아졌다. 정전도 잦지 않고, 단수는 거의 없다. 맛있는 스테이크도 어렵지 않게 먹을 수 있고, 예쁜 베이커리카페에서 우리 취향의 커피도 마실 수 있게 되었다.

도로변 좁은 인도에 줄지어 잠을 자던 노숙인들도 거의 안 보이고, 길에서 볼일 보는 사람도,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는 사람들도 별로 없다.

도시는 활기차게 변했고, 깨끗해졌다.


그런데 도로가 막힌다 싶으면 어디에서 나타나는지 구걸하는 사람들이 일제히 자동차 사이를 요리조리 헤매고 다닌다.


예전 같았으면 어김없이 차 창을 내리고 동전을, 동전이 없으면 지폐를 건넸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러지 않고 있다. 어린 여자가 안고 있는 아기가 본인의 아기가 아닌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남자들이 다른 도시에서 첸나이에 넘어온 이들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도 아니고, 사리를 입은 남자외모의 그들에게 창문을 내리기엔 두려움이 있기 때문도 아니다.


창문을 내리지 않을 마음이, 용기가 이제는 나에게도 생겼기 때문이다. 그들을 바라보는 내 눈이 불쌍함 이면의 모습을 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아기를 안은 어린 여자들의 삶이, 건강하고 젊은 몸을 구걸하는 데 사용하는 이들의 인생이 더 이상 이방인의 내 눈에도 불쌍하게만 보이지 않고 있다.  발전하는 도시에서 다른 일로도 자존감을 지키며 살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그것을 하지 않는 그들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떠안은 삶을 내가 잘 알 수는 없다. 다만 내 마음이 가는 대로 행동할 뿐이다. 내 마음이 더 이상 예전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돈을 구걸해야만 살 수 있는 그 환경이 불쌍한 것이 아니라 자존심을 내려놓은 그들의 인생이 안되었을 뿐이다.

부디 소음과 매연이 뒹구는 뜨거운 도로 위가 아니라 다른 곳에서 그만큼의 노동이라도 하며 살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그마저도 할 수 없는 환경일지라도 그런 꿈은 가지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내가 유일하게 창문을 내리는 경우가 있다. 바로 노인들이다. 그들이 어떤 이유로 길거리를 오가는지 알 길은 없지만 노인들에게는 여전히 내 측은지심이 발동하고 있다. 그들에게는 다시 시작할 기회조차도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그들 앞에서조차 창문을 내리지 않고 막힌 도로 위에서 몇 분 동안 앉아있기엔 내 마음이 여전히 편하지 않기 때문이다.


15년 전에도, 지금도 내 마음이 그들의 상황보다 여전히 중요하게 작용했다는 것을 안다. 측은지심도 결국은 내가 편하려고, 내 중심의 마음이었다. 착한 일도 결국은 내가 중요했던 행동이었다. 동전 몇 푼이 뭐라고 착한 일을 했다는 뿌듯함을 가지고 살았던가!


내 마음이 불편하기 싫어서 오늘 외출 길에는 차가 막히지 않고 쌩쌩 목적지까지 바로 달려가 주었으면 좋겠다. 차가 막히더라도 젊은이들이 아닌 노인 걸인이 내 차 옆으로 지나가면 좋겠다.


볼펜 몇 자루를 들고 차창을 두드리는 어린이를 만나면 또 어떻게 해야 하지? 10년을 더 살고 있는 인도인데 여전히 어려운 숙제이다.


인도 첸나이 도로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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