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1.04
출근부터 퇴근까지 전 일정이 빡빡한 날이 있다. 잠깐 쉴 틈도 없이 긴장한 채로 내리 달리는 날. 집에 돌아왔을 때 나는 이미 하루치 에너지를 모두 써버린 상태였다. 이런 날에는 멍을 때려야 한다. 잠깐 눈을 붙이면 가장 좋겠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멍이라도 때려야 한다.
불멍, 물멍, 하늘멍 다 좋지만 오늘은 고구마멍이다. 우리 집은 10월부터 3월까지 항시 고구마가 구비되어 있다. 일 년 중 절반은 고구마를 먹는다. 주문은 항시 10Kg 박스 단위. 고구마는 밀폐된 상자에 오래 있으면 썩는다. 그래서 고구마 상자가 도착하면 반드시 서늘한 곳에 펼쳐 말려야 한다.
우리 집 부엌 구석에는 고구마 선반이 있다. 선반에는 황금색 보자기가 깔려 있다. 현관 앞에 배송된 고구마를 힘껏 들어 가져온 다음 하나씩 선반에 올린다. 꺼낼 때 살짝 만져보아 부패 가능성이 있는 '물컹이'를 걸러낸다. 만일 비가 오는 날 배송 되거나, 영하권 날씨에서 배송 지연이 된 고구마라면 수령 직시 모두 구워 냉동 보관해야 한다.
자자, 여기까지는 준비과정이다. 준비는 컨디션이 좋은 날에 하면 된다. 고구마멍을 하는 날에는 그저 천천히 고구마를 씻어 오븐에 구운 다음 느긋하게 먹으면 된다. 나는 오븐에 구운 고구마를 좋아한다. 한 시간 동안 오븐에서 잘 익은 고구마를 꺼내면 김이 모락모락 난다. 냄비 장갑을 끼고 철판을 통째로 빼낸 뒤 집게로 고구마를 옮긴다. 자칫하면 손이 댈 수 있으므로 신중하게 하나하나 고구마를 집는다. 멀티태스킹은 절대 불가다.
오븐에서 갓 꺼낸 고구마는 핫팩이나 다름없다. 어찌나 뜨거운지 맨손으로 잡을 수 없다. 아무리 작은 고구마라도 왼손과 오른손을 번갈아 휙휙 주고받지 않으면 화상을 입을 수 있다. 나는 보통 두꺼운 도자기 접시에 구운 고구마를 소복이 쌓아둔다. 안이 노랗게 익은 고구마가 피라미드처럼 쌓여 김을 내뿜는 장면은 그야말로 푸근하다. 나는 고구마 피라미드를 앞에 두고 꽤 오랫동안 바라본다. 그것이 나의 고구마멍이다. 후끈후끈한 원적외선이 보이지 않은 길을 따라 전해진다. 그럼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안구의 긴장이 풀린다.
고구마멍을 때리다 보면 군고구마에서 흙냄새가 난다. 고구마 껍질에 약간의 황토가 묻어있기 때문이다. 어떤 고구마는 껍질에 구멍이 나서 그 사이로 갈색 진액이 흘러나오기도 한다. 진액이 오븐에서 구워지면 머랭처럼 퍼석퍼석한 질감으로 변한다. 나는 진액이 터져 나온 꿀고구마를 가장 먼저 먹는다. 그런 녀석은 필히 안쪽도 환한 금빛으로 가득 차 있다.
서두르지 않고 시간을 들여 껍질을 깐다. 쫀득쫀득해진 양쪽 끝 부분부터 먹어 나간다. 꼬다리 부분은 고구마 말랭이 맛이 난다. 수분이 적어 수축이 빠른 까닭이다. 아직 열기가 뭉쳐있는 가운데 부분은 젓가락이나 포크 혹은 티스푼으로 긁어먹는다. 피곤한 날에는 고구마를 먹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고구마만 먹는다. 책을 읽지 않고, 휴대전화를 만지지 않는다. 그렇게 시간을 낭비하듯 고구마를 먹고 나면 어느새 하루가 마무리된 느낌이 든다. 일하는 내내 느꼈던 '영혼이 흠씬 두들겨 맞은 듯한' 욱신거림도 잠잠해져 있다. 힘든 날에는 멍을 때려야 한다. 11월 초에는 고구마멍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