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영혼의 러너와 호르몬 파티

2026.01.22

by 이준수

러너들은 부상을 매우 두려워한다. 아플까 봐 그런 것이 아니다. 뛰지 못하는 동안 찾아오는 우울한 감정에 대처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달리기는 중독성이 있다. 뛰면 고통스러우면서 동시에 행복하다. 과학적인 근거가 있다. 달리기는 뇌 속에서 파티를 여는 행위다. 엔도르핀과 도파민, 세로토닌이 팡팡 폭죽처럼 터진다. 장기간 몸을 움직여야 하므로 에너지를 생성하고 뇌의 혈류가 증가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걱정이 줄어드는 효과도 있다. 우리가 불안을 느낄 때는 전두엽이 바쁘게 돌아간다. 전두엽은 똑똑하지만 그 특유의 전문성이 꼭 쾌적한 방향으로만 발현되지 않는다. 전두엽은 곧잘 지난날을 후회하고 미래의 암울한 모습에 과몰입한다. 반면 달리면 뇌가 전두엽에 다량의 에너지를 보낼 틈이 없다. 숨 쉬고, 균형을 잡는데 집중해야 한다. 현재에 몰입하는 것이다. 달리기는 움직이는 명상이다.


지난 일요일에 11km를 뛴 후 월, 화, 수 사흘을 제대로 뛰지 못했다. 여행지에서 1km 내외로 찔끔찔끔 내달렸을 뿐이었다. 나는 기본적으로 가만히 있으면 무드가 쳐지는 기질이다. 일요일에 생성한 '달리기 호르몬 삼 형제'가 사라지고 나자 슬슬 기분이 다운되기 시작했다. 목요일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달리고 싶었다. 바람이 8m/s 에다, 체감 기온이 영하 9도면 어떠랴. 코끝에 고드름이 매달리더라도 달리는 편이 '기분 관리'와 삶의 만족도 측면에서 나을 것이다.


아내와 아이들이 메타버스 체험관에서 노는 사이 나는 러닝화 끈을 묶었다. 방한 채비도 단단히 했다. 비니를 뒤집어쓰고 장갑을 꼈다. 상의는 히트텍에 기능성 트레이닝셔츠 그리고 플리스 재킷. 안경 템플 끝에 실리콘 고리를 걸어 귀에 단단히 고정시켰다. 그리고는 그대로 질주.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 그리운 발자국 소리가 타박타박 울려 퍼졌다.


바람이 얼굴을 냅다 후려쳤다. 비염이 심한 내 코에서는 콧물이 줄줄 흘렀다. 나는 연신 장갑 낀 손등으로 코를 훔쳐야 했다. 허연 콧물이 묻어 장갑이 지저분해졌다. 그렇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콧물을 닦아낼 재간이 없다. 나는 운동용 방한 장갑 세 개를 세탁하며 돌려써야만 하는 운명이었다. 며칠 훈련을 게을리했다고 숨이 찼다. 맞바람으로 달릴 때는 누가 나를 넘어뜨리려는 것 같았다. 그나마 경포저류지의 큰고니 가족을 바라보며 고통을 잠시 잊을 수 있었다.


10.16km를 뛰고 화장실에서 손을 씻다가 거울을 보고 푸학! 웃고 말았다. 코흘리개 마냥 코와 입 주위가 침자국인지 콧물자국인지 모를 부연 물질로 얼어붙어 있었다. 장갑으로 얼굴을 훔치다 묻은 것 같았다. 달리다 마주친 분들의 얼굴이 심각했던 건 나의 덜떨어진 얼굴 때문이었겠지. '이 추운 날 코 흘리며 뛰는 바보가 있네' 아마도 이런 생각이 들지 않으셨을까. 면전에서 비웃지 않아 주신 그분들의 세심한 배려에 코끝이 시큰거릴 지경이었다.


맹구가 되었건 영구가 되었건 중요한 건 얼굴이 아니었다. 오늘도 10km를 뛴 덕에 '뇌 파티 호르몬 삼 형제'가 다시 한번 나를 찾아와 주었다. 엄청난 허기와 특유의 러닝 하이가 짝짜꿍을 이룬 상태로 '강릉초당콩감자탕'에 들어갔다. 러닝보다 더 맹렬한 기세로 감자탕(대)과 라면사리와 공깃밥 두 공기를 먹어치웠다. 나와 아내, 초등학생인 두 딸은 냄비까지 싹싹 긁어먹었다. 이래서 러닝 하면 살찐다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그래도 뭐 어떤가. 신나게 뛰고, 맛있게 먹는 낙으로 사는 것이다. 대문자 아이 내향인은 호르몬 파티 때문에라도 러닝을 멈출 수 없다.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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