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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수 Sep 08. 2018

존재적 사랑

18.09.08

5시 50분, 다혜가 연재를 업었다. 능나도 회냉면을 세 시에 먹어서 배가 엄청 불렀다. 월든 171쪽을 펼쳤다. 고전 읽기와 건강하게 깨어있는 삶의 조화를 기술한 부분을 막 읽어가려던 참이었다.


"자기 저녁 준비 안 해?"


다혜가 애들 식사 시간이 있으니 밥을 해달라고 했다. 그간 내가 너무 밥을 안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가 휴직 중이니 당연히 식사 준비를 맡겨 놓은 것 같아 미안해졌다. 쌀을 차가운 물에 두 번 씻고, 손등까지 물을 채웠다. 압력 밥솥에 쌀통을 넣고 취사 버튼을 눌렀다. 삐익- 신호음과 함께 화면에 숫자 30이 떴다.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다시 월든을 펼쳤다.


"자기 반찬 안 해?"


또 아차! 냉장고에서 달걀, 대파, 깻잎을 꺼냈다. 비장의 메뉴 야채 계란말이를 만들어줄 심산이었다. 파를 뭉텅 잘라 정성스레 씻고 있는데 다혜가 어깨너머로 말했다.


"반찬 한 개 가지고는 안 돼. 냉동실에 청국장이 있으니 찌개 끓여줘."

"응, 그것도 할게."

"아니, 계란 부치기 전에 육수를 내야지. 그래야 계란 말이 될 때쯤 두부 넣고 버섯 넣어 식탁에 차리지."


말이 너무 빨라 멍을 때렸다. 다혜는 내가 요리와 살림을 잘 해야 아내를 존재적으로 사랑할 수 있다고 했다. 요리와 살림에 무지한 남자는 여성에게 의존하게 되는 것은 물론이고, 아내를 도구적으로 사랑할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생존과 일상의 편의를 위해서 사랑하는 사이가 되고 싶지 않다고 덧붙였다.


나는 다혜를 사랑한다. 다혜가 나를 요리 못해서 요리해주는 아내를 필요에 의해 사랑하는 사람으로 여긴다면 나도 슬프고, 다혜도 슬플 것이다. 상상이 거기까지 뻗치자 나는 더욱 진지해져 깻잎을 잘게 다듬어 계란물에 넣었다. 올리브유를 프라이팬에 두르고 예열을 했다. 5분 있다가 다혜가 나보고 나오라고 했다. 자기가 손이 빠르고 맛도 더 잘 내니 요리를 하겠다고 했다. 대신 나더러 칼을 달라고 했다.


"오빠는 나 없으면 못 사는 줄 알아. 그러니까 다혜 없으면 이준수는 절대 못 생존한다, 다혜가 참 고맙다 이렇게 살라고."


청국장을 떠먹으며 나는 이 여자를 존재적으로 사랑하는 거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일부러느리게하는거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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