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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았던 화려함, 팔러 오뜨꾸티

지금은 없는 서울의 카페들 - 07

by 이정미

한강진역 SPC 빌딩의 고급 베이커리 패션5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지만, 한때 그 지하에 있던 팔러 오뜨꾸티라는 디저트 카페 겸 티룸을 기억하는 사람은 얼마나 있을지 모르겠다. ‘오뜨꾸뛰르’를 변형한 ‘오뜨꾸티’라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강렬한 화려함을 지향하는 가게였다. 그러나 이곳을 알고 좋아하는 사람들이라고 해도 대부분은 그냥 ‘팔러’라고만 불렀던 것 같다. 패션5와 마찬가지로 파리크라상의 산하 브랜드였다고 한다.


패션5에 자주 다니던 시절, 자연스럽게 한 층 아래에 있는 팔러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홍차를 워낙 좋아하기 때문에 활동 반경 내에서 찻집을 발견하면 한 번은 들러 보는 편이고, 팔러도 그렇게 해서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식사 시간에는 뷔페도 운영했지만 나는 항상 오후에 차를 마시러 갔다.


지상의 패션5가 현대적인 명품 부띠끄 같은 분위기라면, 지하의 팔러는 패션5의 세련됨을 어느 정도 공유하면서 거기에 공주님 방 같은 로맨틱함을 추가했다. 테이블과 바닥은 흰색 대리석이었고, 구석 자리에는 연보랏빛 반투명한 커튼이 드리워 있었다. 압권은 여자 화장실이었다. 화장실로 통하는 복도는 패션잡지 《보그》의 옛날 표지들을 액자에 넣어 장식했다. 복도 끝의 보라색 문을 열고 화장실에 들어가면 전체 공간의 거의 절반이 파우더룸이었는데, 결혼식장의 신부 대기실에 놓을 것 같은 긴 의자와 조화로 꾸며져 있었다.


팔러 6.png 신부 대기실 같았던 파우더룸. 사진 출처 https://roopong.tistory.com/6


디저트 카페 겸 티룸인데 디저트나 차보다도 화장실이 더 유명했다. 바꾸어 말하면 입보다는 눈이 더 즐거운 가게였다. 그렇다고 해서 음식이 형편없었다는 뜻은 아니다. 사람마다 평이 갈렸던 것 같지만 나는 팔러의 디저트에 특별히 실망한 적은 없었다. 특히 크레이프 케이크는 다른 가게들보다도 맛있었기 때문에 아직까지 기억날 정도다. 홍차는 위층의 패션5와 마찬가지로 프랑스 브랜드 쿠스미의 제품들이었는데, 패션5보다 더 다양한 차를 갖춰 놓고 있었다. 웨지우드 티팟에 찻잎을 넣어서 우렸고 찻잔에 얹어 사용하는 스트레이너를 함께 줬다. 우유도 요청하면 무료로 줬던 것으로 기억한다. 티백을 사용하는 패션5보다 더 제대로 된 서빙이었다.


팔러 4.JPG 아직까지 기억나는 크레이프 케이크. 웨지우드 찻잔을 사용하는 카페는 여러 곳 봤지만 웨지우드 티팟을 사용하는 곳은 흔치 않다.


애프터눈 티세트를 예약 없이 바로 주문할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었다. 3단 트레이에 접시 하나가 옆에 추가되어 총 네 개의 접시에 담긴 호화로운 세트였다. 영국식 애프터눈 티의 전통을 따라 샌드위치, 스콘, 디저트로 구성되어 있었다. 맨 위층의 알록달록한 디저트가 제일 눈에 띄었는데, 가방 등 패션 소품 모양으로 만든 것도 있었다. 다만 패션 소품 모양 디저트의 맛이나 식감은 그다지 좋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본격적인 디저트라기보다는 먹을 수 있는 장식이었다.


팔러 1.JPG 화려한 티세트. 옆에 스콘 접시 하나가 더 있다.


카페도 결국은 먹고 마시는 곳이니 입보다 눈이 더 즐겁다는 것은 약점이라면 약점이었다. 그러나 음식보다 인테리어나 분위기에 치중하는 카페는 팔러 외에도 많았다. 팔러의 더 큰 약점은 높은 가격이었다고 생각한다. 2012년 개점 당시 이미 9천원이나 했던 홍차는 이듬해 심지어 1만2천원으로 대폭 올랐다. 아메리카노도 9천원, 카페라떼는 1만원이었다. 거기에 10% 부가세까지 붙었다. 지금 기준으로도 비싸고, 거의 10년 전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더욱 비싸다. 가격에 걸맞도록 엄청나게 맛있는 음료와 디저트만 나온다고 쳐도 자주 가기에는 망설여지는 가격이다. 그리고 실제로 모든 음료와 디저트가 그 가격에 걸맞지도 않았다.


위층의 패션5도 결코 저렴한 곳은 아니지만 팔러와 비교하면 패션5가 가성비 좋게 느껴질 정도였다. 비록 조금 더 시끄럽고 차도 티백으로 서빙되기는 해도, 한두 층만 올라가면 마찬가지로 맛있는 디저트와 함께 쿠스미의 차를 마실 수 있는데 굳이 더 많은 돈을 내고 팔러에 갈 동기가 부족했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도 나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주말에는 연인이나 친구와 함께 예쁜 사진을 찍으러 온 사람들로 거의 만석일 때도 있었지만 평일에는 텅텅 비어 있었다. 마치 가게를 전세 낸 것처럼 나 혼자 앉아서 차를 마신 적도 있다. 그 넓고 화려한 가게가 주말 손님만으로 유지가 될까 싶었는데, 역시 2년 정도 후에 문을 닫고 말았다. 시험 삼아 운영해 보다가 수익성이 좋지 않아 그만둔 것이 아닐까 싶다.


스마트폰과 소셜미디어가 한창 보급되기 시작한 시기였으니 ‘사진을 찍어 올리기 좋은 가게’에 초점을 맞췄던 것일까? 시도 자체는 좋았다고 생각한다. 고급화 전략도 내실이 더 뒷받침되었다면 나쁘지 않았을 것이다. 지하에 있었기 때문에 눈에 잘 띄지 않았는데, 혹시 홍보를 더 적극적으로 했다면 어땠을까?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당시 팔러를 좋아했던 편인 사람으로서 이것저것 생각해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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